노공필(盧公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178ACF5D544B1445X0 |
자(字) | 희량(希亮) |
호(號) | 국일재(菊逸齋) |
생년 | 1445(세종 27) |
졸년 | 1516(중종 1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파주(坡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노사신(盧思愼) |
출신지 |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지금의 파주) |
공신호 | 원종공신(原從功臣) |
[상세내용]
노공필(盧公弼)
1445년(세종 27)∼1516년(중종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주(坡州).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의 큰아들이다.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지금의 파주) 출신이다.
1462년(세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사직서령(社稷署令)을 지낸 뒤 1466년 춘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 성균관직강이 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부제학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참의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483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1489년에 공조판서가 된 데 이어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의정부우참찬, 1503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이듬해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그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가 1507년(중종 2)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명나라에 가서 중종 즉위의 경위를 설명하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하고 일가친척의 관혼상제를 두루 살폈으나, 자신은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였다.
1462년(세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사직서령(社稷署令)을 지낸 뒤 1466년 춘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 성균관직강이 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부제학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참의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483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1489년에 공조판서가 된 데 이어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의정부우참찬, 1503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이듬해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그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가 1507년(중종 2)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명나라에 가서 중종 즉위의 경위를 설명하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하고 일가친척의 관혼상제를 두루 살폈으나, 자신은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였다.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명 : "공필(公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