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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지(楊熙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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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희지(稀枝)
자(字)정보(楨父)
호(號)대봉(大峰)
생년1439(세종 21)
졸년1504(연산군 10)
시대조선전기
본관중화(中和)
활동분야문신 > 문신
양맹순(楊孟淳)
저서『대봉집』

[상세내용]

양희지(楊熙止)
1439년(세종 21)∼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 한때 희지(稀枝)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군수 양맹순(楊孟淳)의 아들이다.

1462년(세조 8)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1464년에 동료 유생들과 함께 세자가 추진하는 원각사(圓覺寺) 개창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종의 부름으로 편전에서 알현하였을 때 왕으로부터 희지라는 이름과 정보(楨父)라는 자를 하사받았다. 이해에 검열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에 승문원정자가 되었고 1475년부터 3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78년에 부수찬에 올라 경연관을 겸직하였고, 이어서 교리문학검상을 역임하였다.

1494년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7년(연산군 3)에 직제학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무오사화 때에는 좌부승지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바로 사직하였다.

1500년에 다시 부총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박림종(朴林宗) 등을 소구(疏救)하다가 우의정 성준(成俊)의 배척을 받은 데다가 왕으로부터 임사홍(任士洪)의 당여로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로 지목받아 익산에 부처되었다.

1502년에 죄가 풀려 동지중추부사로 서용되고 겸세자우부빈객(兼世子右副賓客)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고 재주가 있었으나 임사홍유자광(柳子光)노공필(盧公弼) 등과 친하고, 임금의 뜻만 맞추려 하는 등 출처(出處)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대봉집』이 있다. 대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