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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金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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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종동(金終同)
자(字)영중(瑩中)
호(號)묵재(黙齋)
시호(諡號)공양(恭襄)
생년1425(세종 7)
졸년1485(성종 16)
시대조선전기
본관언양(彦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숙보(金叔甫)
서씨(徐氏)
공신호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상세내용]

김관(金瓘)
1425년(세종 7)∼1485년(성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초명은 김종동(金終同), 자는 영중(瑩中), 호는 묵재(黙齋).

부친은 선천군사(宣川郡事) 김숙보(金叔甫)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으나, 처가 장사치의 무늬있는 비단을 절취한 사건에 연루되어 황해도 경천참(敬天站)으로 귀양가서 그곳 역리(驛吏)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어머니 서씨(徐氏)의 간청으로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1461년 도관좌랑(都官左郞)으로 대마도경차관 김치원(金致元)종사관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으며, 전라도경차관을 거쳐 1465년에는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종사관으로 활약한 공으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 낙산사의 조성비용을 민간에서 지나치게 거둬들였다는 혐의를 받아 부호군으로 좌천되었으나, 뒤에 낙산사의 조성공사가 무사히 끝나자 도리어 논상(論賞)되었다.

1469년(예종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었으나 도적을 잡지 못하였다고 하여 체직되었다.

1475년(성종 6) 영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79년 동지중추부사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1481년 전주부윤을 지내고, 1483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다.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시호는 공양(恭襄)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