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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손(李亨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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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창백(昌伯)
시호(諡號)평호(平湖)
생년1418(태종 18)
졸년1496(연산군 2)
시대조선전기
본관가평(加平)
활동분야무신 > 무신
이다림(李多林)
외조부송리(宋理)
공신호원종공신(原從功臣)
공신호적개공신(敵愾功臣)

[상세내용]

이형손(李亨孫)
1418년(태종 18)∼1496년(연산군 2).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가평(加平). 자는 창백(昌伯).

부친은 이다림(李多林)이며, 모친은 지금주사(知錦州事) 송리(宋理)의 딸이다.

1455년(세조 1) 12월 판관으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전라도절도부사전주부윤을 겸하였다. 처음에는 연산군(連山君)에 봉하여졌다가 곧이어 가평군(嘉平君)으로 개봉되었다.

1471년(성종 3) 2월 행공주목사를 거쳐, 1477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전임되었다가 12월에 청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주목사로 도임할 때 너무 많은 물건과 수행원들을 거느렸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479년 정월 다시 서용되고 1483년 10월 다시 가평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옥구무장석성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옥구현감 당시 체임된 적이 있으나, 이는 그가 현명하지 못하여서라기 보다는 그 지역 민심이 나빠서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까닭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체임된 이후 '30년 동안 옥구현에서 수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승정원의 보고는 어느정도 사실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1490년 윤9월 부총관에 임명되고, 곧이어 전라도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평호(平湖)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