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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린(李季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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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경(子耕)
시호(諡號)공무(恭武)
생년1401(태종 1)
졸년1455(세조 1)
시대조선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종선(李種善)
조부이색(李穡)
공신호좌익공신(佐翼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계린(李季疄)
1401년(태종 1)∼1455년(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경(子耕). 색(穡)의 손자로, 지중추원사 이종선(李種善)의 아들이며,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貞順公主)의 사위이다.

1416년(태종 16) 이로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을 제수받았다. 태종은 16세의 젊은 나이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마땅하지 않게 여겼으므로, 그는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1436년(세종 18) 세종에 의하여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441년 형조참판이 되고, 다음해 경기도관찰사, 1444년 호조참판,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446년에는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다음해인 144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각 지방의 사정을 살펴보고 계속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처참한 것을 보았다.

그는 백성 중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사람의 고기를 먹는 사례가 있다는 계문을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임금은 이와같은 해괴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동부승지였던 그의 아우 계전(季甸)에게 하명하였다.

이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백강(李伯剛)의 하인 김간으로부터 들은 바를 계문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김간을 문초하니 그는 조수명으로부터 들었고, 조수명은 다시 해주에 사는 복덕이가 자기집 울타리 밑에 어린이의 머리가 있었다는 말이 와전되어 계린에게 전달된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황해도를 비롯한 각 지방에서는 굶어 죽은 자가 많아 인심이 흉흉하여 이러한 풍문이 났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는 풍문만을 믿고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아 많은 무리를 자아내어 파직되었다.

1449년 별시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 관직은 실직은 아니지만 이것을 계기로 다시 관직에 오르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같은해 개성유수, 1451년(문종 1) 지중추부사, 1453년(단종 1)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1454년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력한 아우 계전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 좌찬성이 되었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송정현(宋正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