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지(金連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5F0C9C0B1396X0 |
자(字) | 간보(幹甫) |
시호(諡號) | 대경(戴敬) |
생년 | 1396(태조 5) |
졸년 | 1471(성종 2)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원주(原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을신(金乙辛) |

[상세내용]
김연지(金連枝)
1396년(태조 5)∼1471년(성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간보(幹甫).
부친은 중추원부사 김을신(金乙辛)이다.
1411년(태종 11)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형조좌랑을 거쳐, 1428년(세종 10)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에 올랐으나, 형옥관리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고신(告身)이 회수되고 귀양을 갔다.
그뒤 관직에 복귀되어 지평을 지내고, 1442년 세종이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시키고자 둔 첨사원(詹事院)의 동첨사(同詹事)가 되어 출납을 주관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조의 관원과 틈이 생겨 부평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그가 극심한 흉년을 만난 백성을 잘 진휼한 공으로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발탁되고, 이어서 상호군(上護軍)에 올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참의를 거쳐 1452년(문종 2)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대사헌‧한성부윤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로서 선정을 폈다.
그뒤 대사헌‧한성부윤을 재차 역임하고, 1467년(세조 1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근실하여 공무에 충실하였으며, 언행을 함에 있어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시호는 대경(戴敬)이다.
부친은 중추원부사 김을신(金乙辛)이다.
1411년(태종 11) 1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감찰‧형조좌랑을 거쳐, 1428년(세종 10)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에 올랐으나, 형옥관리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고신(告身)이 회수되고 귀양을 갔다.
그뒤 관직에 복귀되어 지평을 지내고, 1442년 세종이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시키고자 둔 첨사원(詹事院)의 동첨사(同詹事)가 되어 출납을 주관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조의 관원과 틈이 생겨 부평현령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그가 극심한 흉년을 만난 백성을 잘 진휼한 공으로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발탁되고, 이어서 상호군(上護軍)에 올라 지형조사(知刑曹事)를 겸하였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참의를 거쳐 1452년(문종 2)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대사헌‧한성부윤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로서 선정을 폈다.
그뒤 대사헌‧한성부윤을 재차 역임하고, 1467년(세조 13)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근실하여 공무에 충실하였으며, 언행을 함에 있어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시호는 대경(戴敬)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대표명 | 김연지(金連枝) |
명 | 연지(連枝) |
명 : "연지(連枝)"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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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