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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첨(金瞻){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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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구이(金九二)
자(字)자구(子具)
호(號)연계(蓮溪)
생년1354(공민왕 3)
졸년1418(태종 18)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회조(金懷祖)
출신지광주(光州)

[상세내용]

김첨(金瞻)
1354년(공민왕 3)∼1418년(태종 18).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구이(金九二), 자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蓮溪). 광주(光州) 출신. 자혜부윤(慈惠府尹) 김회조(金懷祖)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한 뒤, 친종호군(親從護軍)우사간(右司諫)예조전서(禮曹典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대사헌경연관(經筵官) 등의 관직을 거쳤다.

1390년(공양왕 2)에 개성의 5부와 각 도의 목(牧)‧부(府)에 있는 유학교수관(儒學敎授館)에 원자와 종실의 자제들이 입학하도록 상소하였고, 1392년(태조 1)에는 정몽주와 내란을 음모하였다는 혐의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404년(태종 4)에 태종이 성수초례(星宿醮禮)를 상정(詳定)하게 하자 도관(道觀)인 태청관(太淸觀)의 보수와 천황대제(天皇大帝)의 재초(齋醮)도 함께 진언하였다.

이에 대해 권근(權近)하륜(河崙) 등이 반대하자 고려조의 사례를 들어 도교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또 같은해 계품사(計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 여진족과의 영토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공로로 태종은 밭 50결을 하사했다.

1407년에 옥사(獄事)에 걸려 구금되었다.

그러나 도교를 깊이 신봉한 태종은 그를 아주 버리지는 않고, 소격전(昭格殿)제조(提調)로 삼아 도교에 관한 자문을 구하였다.

1411년에 태종이 다시 도교의 신인 삼성(三聖)과 주작(朱雀)‧대국(大國)에 관해서 하문하자, 고려의 전례를 들어 주작은 시좌궁(時坐宮)남쪽에 단을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삼성과 대국도 폐지함이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1415년에 『성수경(星宿經)』태종에게 올렸다. 같은해에 하륜이 그의 박학함을 높이 평가하여 육조판서에 봉하도록 상소하였으나, 태종은 과거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와 무리지어 불충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417년 태종에게 사전(祠典)제정의 명을 받았으나, 그 이듬해 죽었다. 유교의 기반이 굳혀지는 조선 초기에 도교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한 인물이었으며, 또 불교에도 관계가 있어 문묘(文廟)의 석전(釋奠)에 쇠고기를 못 쓰게 하여 유사(有司)의 탄핵을 받은 일도 있었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東史綱目
燃藜室記述
朝鮮道敎史(李能和)

[집필자]

송항룡(宋恒龍)
대표명김첨(金瞻){1}
첨(瞻)
성명김담(金聸), 김첨(金瞻)

성명 : "김첨(金瞻)"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1皆封君是非古制也又謂禮曹判書李膺曰后妃之族封君非古制也卿宜考歷代之制以進於是外戚封君者命悉罷之○上召金瞻曰壁上欲畵前代可法之事以資觀省瞻對曰周文王爲世子問寢於王季漢高祖獻壽於太上皇周宣王后諫宣王晏起唐長孫
國朝編年v11何如人之歸耶洪進斗筲固不足責德輿以年老之人趨附新進之士得無羞恥今乃目珥小人此非前後反覆者耶至於許通事金瞻校理前於經筵啓之今若律之以變亂成憲則瞻爲謀首珥爲隨從何乃以瞻而論珥也哉○命革罷吏曹郞官薦望規式○甲山
國朝捷錄v01李潑光州人景㴠北山浩兄仲虎子汝立獄拷柳根見文崔雲溥演從孫栗谷妹夫翰林江陵人右金貴榮又選甲戌金應南見相金瞻大瞻弘度子誠立父花塘校理四世湖堂秀臣八代祖李浩潑弟號南溪兄及八十老母同死汝立獄右金貴榮又選己卯沈喜壽
郯述v02金 瞻
東國續修文獻錄v1人贊成文衡崔雲溥大中瀣子江陵人翰林金應南重救斗巖珩子原州人左相扈聖勳李洁景淵南溪大諫潑弟光山人應敎金瞻大瞻東岡典翰弘度子安東人修撰
國朝人物志v2壬辰戰亡同上尹勉字致中坡平人判官汝霖曾孫庚午生員丙子文科府使壬辰被害同上金瞻字子瞻號荷塘又號南岡安東人典翰弘度子丙子文科校理癸巳出補知禮縣監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