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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질(閔無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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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410(태종 10)
시대조선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제(閔霽)
공신호정사공신(定社功臣)
공신호좌명공신(佐命功臣)

[상세내용]

민무질(閔無疾)
미상∼1410년(태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둘째아들이며, 태종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며, 좌군총제(左軍摠制)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등을 역임하고 사은사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7월 형 민무구(閔無咎)와 함께 연루된 옥에 대한 죄목을 이듬해 10월의 교서에 10가지로 열거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협유집권(挾幼執權)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즉, 1402년 왕이 창종(瘡腫)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이들이 왕의 외척이며, 정사‧좌명 공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데도 이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의 성격과 정비(靜妃: 원경왕후)태종과의 불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태종의 제1차 선위파동으로 민무질 형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세자 정혼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세자 정혼문제는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하여,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어 하륜(河崙)좌의정에서 물러나고, 6일 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李和) 등이 민무질 등 민씨들을 죄줄 것을 청하여 옥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화 등이 열거한 민무질 형제의 죄는 선위파동 때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은근히 기대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한 점과,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한 것 등이었다.

옥이 발생한 지 2일 후 민무질장단(長湍)에 송치하고 19일 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환수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다시 대구에 유배시켰다. 민제가 죽고 한달이 지난 1408년 10월 그들의 죄를 비난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곧 삼척진(三陟鎭)에 옮겨졌다.

그뒤 이무의 옥으로 제주도에 옮겨지고 다시 조호(趙瑚)의 난언이 드러난 지 2일 만에 성석린(成石璘) 등의 강경한 처단 건의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명하였다.

민씨 형제의 옥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한 사람은 이숙번(李叔蕃)으로, 개국공신인 이숙번 일파가 고려의 구가세족(舊家世族)인 하륜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제거하려는 정치파동 속에서 민씨 형제의 옥이 일어났고, 이 옥은 또한 외척제거라는 점에서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太宗의 外戚除去에 대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합집호, 1962)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