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흥(慶復興)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BDBCF5D765D1380X0 |
이명(異名) | 경천흥(慶千興) |
시호(諡號) | 정렬(貞烈) |
생년 | ?(미상) |
졸년 | 1380(우왕 6)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관료 > 상신 |
부 | 경사만(慶斯萬) |
공신호 | 일등공신 |
공신호 |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 |
공신호 | 일등공신 |
[상세내용]
경복흥(慶復興)
미상∼1380년(우왕 6). 고려의 재상.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경천흥(慶千興).
부친은 우대언(右代言) 경사만(慶斯萬)이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 3)에는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1356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다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문하정사(知門下政事)를 거쳐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에 올랐다.
이때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북방의 정세도 불안정하여 도성수축(都城修築)의 논의가 일어나자, 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 등과 더불어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했다.
1358년에 참지문하정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참지정사로서 서경군민만호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를 겸하고, 다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 북방을 방어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앞서 기철(奇轍) 등 부원파(附元派) 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해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원수가 되었다가 뒤이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주(安州)에 진을 쳤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장략(將略)이 없는 사람을 장수로 삼은 것은 등용한 사람의 잘못이다.”라는 홍언박(洪彦博)의 두둔으로 무사했다.
이듬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뒤이어 평장사(平章事)‧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로 난을 피했다.
1363년 12월,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참소하여 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워서 요양(遼陽)의 군사로써 호송하게 되자,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다.
또 그해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최유가 군사 1만으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고 다시 선주(宣州: 지금의 宣川)에 이르렀으나,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들을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에서 무찔렀다고 하는 첩보를 알리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좌시중(左侍中)에 임명했다.
1365년에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그때는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귀양가고 그 집은 적몰(籍沒)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에 제배되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를 겸하며 전선(銓選)을 맡았다.
1374년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공민왕이 시해되자 종친을 세우려 했으나 이인임(李仁任)의 주장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이인임과 함께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정도전(鄭道傳)을 귀양보냈다.
또, 왕이 서연(書筵)을 게을리 하려는 것과 전주(銓注: 人事行政)의 문란을 바로잡는 데 노력했다.
1377년(우왕 3)에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했다.
1380년에는 이인임‧지윤(池奫) 등과 뜻이 맞지 않아 날마다 술만 마시면서 도당(都堂)에도 참여하지 않자, 이를 미워한 이인임‧임견미 등의 참소로 청주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아들로 경보(慶補)‧경진(慶臻)‧경의(慶儀)가 있다.
부친은 우대언(右代言) 경사만(慶斯萬)이다. 벼슬을 여러 번 옮겨 감찰‧장령이 되었고, 1354년(공민왕 3)에는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1356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다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문하정사(知門下政事)를 거쳐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에 올랐다.
이때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북방의 정세도 불안정하여 도성수축(都城修築)의 논의가 일어나자, 정세운(鄭世雲)‧유숙(柳淑) 등과 더불어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중지하게 했다.
1358년에 참지문하정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참지정사로서 서경군민만호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를 겸하고, 다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 북방을 방어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앞서 기철(奇轍) 등 부원파(附元派) 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해에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원수가 되었다가 뒤이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주(安州)에 진을 쳤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장략(將略)이 없는 사람을 장수로 삼은 것은 등용한 사람의 잘못이다.”라는 홍언박(洪彦博)의 두둔으로 무사했다.
이듬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뒤이어 평장사(平章事)‧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침입하자,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로 난을 피했다.
1363년 12월,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참소하여 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워서 요양(遼陽)의 군사로써 호송하게 되자,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안주에 진을 쳤다.
또 그해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최유가 군사 1만으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고 다시 선주(宣州: 지금의 宣川)에 이르렀으나,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들을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에서 무찔렀다고 하는 첩보를 알리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좌시중(左侍中)에 임명했다.
1365년에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으나, 그때는 신돈(辛旽)이 권세를 부리고 있었으므로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침내 신돈의 배척을 받아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67년 오인택(吳仁澤)‧안우경(安遇慶)‧김원명(金元命) 등과 신돈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을 받고 흥주(興州)로 귀양가고 그 집은 적몰(籍沒)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자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에 제배되고, 정방(政房)의 제조(提調)를 겸하며 전선(銓選)을 맡았다.
1374년 문하시중으로 있을 때, 공민왕이 시해되자 종친을 세우려 했으나 이인임(李仁任)의 주장에 의해 우왕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이인임과 함께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는 정도전(鄭道傳)을 귀양보냈다.
또, 왕이 서연(書筵)을 게을리 하려는 것과 전주(銓注: 人事行政)의 문란을 바로잡는 데 노력했다.
1377년(우왕 3)에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서 개성 근처까지 침범한 왜구에 대비했다.
1380년에는 이인임‧지윤(池奫) 등과 뜻이 맞지 않아 날마다 술만 마시면서 도당(都堂)에도 참여하지 않자, 이를 미워한 이인임‧임견미 등의 참소로 청주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아들로 경보(慶補)‧경진(慶臻)‧경의(慶儀)가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대표명 | 경복흥(慶復興) |
명 | 복흥(復興) |
봉호 | 청원부원군(清原府院君) |
성명 | 경복흥(慶復興), 경시중복흥(慶侍中復興) |
시호 | 정렬(貞烈) |
호 | 청의당(清義堂) |
명 : "복흥(復興)"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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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