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흥방(廉興邦)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FCD765BC29D1388X0 |
자(字) | 중창(仲昌) |
호(號) | 동정(東亭) |
생년 | ?(미상) |
졸년 | 1388(우왕 14)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파주(坡州) |
활동분야 | 기타 > 간신 |
부 | 염제신(廉悌臣) |
저서 | 『동정집』 |
[상세내용]
염흥방(廉興邦)
미상∼1388년(우왕 14). 고려의 간신. 본관은 파주(坡州). 자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
부친은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이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장원급제, 좌대언을 거쳐 1362년 지신사(知申事)로서 홍건적을 격파하고 서울을 탈환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그 이듬해 위위윤(衛尉尹)으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이어 밀직부사를 거쳐 1367년에는 밀직지신사가 되었고, 1374년 탐라(耽羅: 濟州) 목호(牧胡)의 난에 밀직제학으로서 도병마사가 되어 최영(崔瑩) 등과 함께 출전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한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이인임의 심복 임견미(林堅味)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모함하여 축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하였으며, 백성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연락(宴樂)에 빠져 있던 우왕을 충동하여 음행을 일삼도록 하여 국정이 더욱 문란해졌다.
또, 종을 시켜 남의 토지를 강탈하였는데, 1387년 그의 종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강탈하자 이에 분개한 조반이 이광을 잡아 죽이므로, 조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조반과 그 가족을 잡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상만호(上萬戶)의 지위를 이용하여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이에 그들의 행패를 미워하던 우왕 및 최영‧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하여 그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나 시험관으로 공정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저서로는 『동정집』이 있다.
부친은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이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장원급제, 좌대언을 거쳐 1362년 지신사(知申事)로서 홍건적을 격파하고 서울을 탈환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그 이듬해 위위윤(衛尉尹)으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이어 밀직부사를 거쳐 1367년에는 밀직지신사가 되었고, 1374년 탐라(耽羅: 濟州) 목호(牧胡)의 난에 밀직제학으로서 도병마사가 되어 최영(崔瑩) 등과 함께 출전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한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이인임의 심복 임견미(林堅味)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모함하여 축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하였으며, 백성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연락(宴樂)에 빠져 있던 우왕을 충동하여 음행을 일삼도록 하여 국정이 더욱 문란해졌다.
또, 종을 시켜 남의 토지를 강탈하였는데, 1387년 그의 종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강탈하자 이에 분개한 조반이 이광을 잡아 죽이므로, 조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조반과 그 가족을 잡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상만호(上萬戶)의 지위를 이용하여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이에 그들의 행패를 미워하던 우왕 및 최영‧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하여 그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나 시험관으로 공정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저서로는 『동정집』이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손홍렬(孫弘烈)
명 : "흥방(興邦)"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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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