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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甄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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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867(신라: 경문왕 7/발해: 대건황 11)
졸년935(신라: 경순왕 9/후백제: 견훤 44/태조 천수 18)
시대후백제
활동분야왕실 > 왕
아자개(阿慈介)
상원부인(上院夫人)
남원부인(南院夫人)
고비(姑比)

[상세내용]

견훤(甄萱)
867년∼935년. 후백제의 시조. 재위 892∼935년.
1. 가계
본래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의 농민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2. 신라 왕실의 문란과 후백제의 성립
자랄수록 체모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이때는 신라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하여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하여졌고, 또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의 유망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때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光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전무공등주군사(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상주국(御史中丞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자칭하고, 북원(北原: 지금의 原州)의 적수(賊首)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全州)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3. 고려신라와의 관계
이듬해에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陜川)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 왕건(王建)나주를 정벌함에 노하여, 보기(步騎) 3000인을 거느리고 이를 포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뒤, 왕건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일길찬(一吉飡) 민극(閔郤)을 파견하여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때의 고려후백제는 잦은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은 보기 1만인으로 대야성을 쳐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淸道)으로 옮겼다. 이에 신라 경명왕김율(金律)고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924년(경애왕 1)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파견하여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安東, 혹은 尙州부근)을 공격하였으나, 성중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왕건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화해를 맺었다.

그러나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925년에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왕건이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내어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해는 곧 깨졌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지자 신라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927년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尙州)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永川)를 습격하였다. 이어서 경주로 진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건공산(公山)싸움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강주(康州: 지금의 晉州)를 공격하여 300여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 지금의 軍威)을 공격하여 1000여인을 참살하였다.
4. 왕조의 몰락
그러나 막강하였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安東)전투에서 8000여인의 사상자를 내는 패전으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龔直)고려에 투항하여 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어구에 침입하여, 100여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3백여필의 말을 잡아왔다. 그리고 934년에는 운주(運州)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양검강주(康州: 지금의 晉州) 도독으로, 용검무주(武州: 지금의 光州) 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이에 신검이찬(伊飡)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935년 3월에 신검에게 금산사에 유폐당하고 금강은 죽었다. 금산사에 석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이어 신검양검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쌓인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는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5. 국제 관계
정치가로서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면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또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내었다. 그 이듬해에는 오월(吳越)과 통하였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마돌(麻咄) 등 35인이 당도하자 견훤은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었다.

또 922년과 929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처럼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한 것이다.

또,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에 의하여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하였고, 또 당시 지방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후삼국의 쟁패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쇠망하여 가는 신라의 관리로서 출발한 세력기반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고,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조직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했다. 기성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난 뒤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후백제 건국 뒤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고 있어 후삼국의 통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後三國時代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甄萱의 家鄕에 대하여(金庠基, 李秉岐紀念論文集, 1966;東方史論叢, 1974)
後百濟 金剛에 關하여(朴漢卨, 大丘史學 7‧8합집, 1973)
後百濟 甄萱硏究(申虎澈, 百濟論叢 1, 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85)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대표명견훤(甄萱)
성명견훤(甄萱)
왕명견훤(甄萱)

왕명 : "견훤(甄萱)"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3名曼定康王女弟唐僖宗光啓三年丁未立丁巳禪位在位十一年墓在梁山郡黃山○辛亥弓裔據原州壬子甄萱據全州
歷代總要v03同年定賦稅法○同年始行八關會○己卯剏十寺于都城○同年追王三代○甲申遣使朝後唐○乙酉耽羅㕵來貢○丁亥討甄萱敗績○庚寅初置學校于西京○癸巳後唐冊王始行後唐年號○甲午渤海世子光顯來附○乙未新羅亡○丙申討平後百濟
紀年便攷v3全州府本百濟完山新羅眞興王寘完山州景德王改今名以備九州孝恭王時甄萱建都於此稱後百濟高麗太祖十九年討平神劒改安南都護府二十三年復為全州成宗十二年稱承化節度按撫使十四年寘
東國歷代總目v01濱海南至漢水西北踰遼河百濟西南濱海東至智異山北抵漢水此其界也新羅滅麗濟二國而統一焉及其衰也弓裔據鉄原甄萱據完山境土割裂高麗始祖討平而合幷之西北以鴨綠江爲限東北以先春嶺爲界至成宗畫域內爲十道顯宗改[첨지我]
東國歷代總目v01全州古百濟完山甄萱都此稱後百濟高麗太祖討平之本朝以豊沛舊地陞爲府○益山古箕準所都國號馬韓百濟褞祚王幷之號金馬渚新羅改爲
東國歷代總目v01壬子甄萱叛據完山○萱尙州人本姓李父阿玆介以農自活耕於野其母餉之時萱生未久置諸林下虎來乳之及長自改姓曰甄初赴海
東國歷代總目v01定官制設八關會卽新羅故事都松岳○癸未是歲後唐莊宗稱帝滅後梁○甲申遣使朝後唐○丁亥甄萱圍王於公山大將軍申崇謙死之○王聞萱攻陷新羅親率兵邀萱於公山洞藪大戰不利萱兵圍王急崇謙容㒵酷似王崇謙知
歷代帝王紀年v01馬韓弁韓之辨諸說不同而王隆之稱松岳爲弁韓甄萱之稱完山爲馬韓最爲明白今從之此外小國如扶餘沃沮靺鞨樂浪肅愼之屬其數甚多而其年代沿革有難考信只因事附見
歷代帝王紀年v01弓裔甄萱
國朝捷錄v01麗太祖與甄萱戰甚急乃匿王葭斤伐王乘車力戰死之壯節公
建置沿革攷文王復置完山州景德王十五 年改今名以備九州孝恭王時甄萱建都於此稱後 百濟高麗太祖十九年討平神劍改安南都護
建置沿革攷百濟發羅郡 一云通義 新羅改錦山郡 一云錦城 羅季甄萱稱 後百濟盡有其地未幾郡人附于後高麗王弓裔弓 裔命
建置沿革攷 新羅取百濟仍置都督景德王十 六年改武州眞聖王六年甄萱襲據稱後百濟尋移 都全州弓裔以高麗太祖爲精騎太監帥
東國名儒錄n1책弓位野王喜 之弓位一面畫絡賜牌以賜回雁之地姓本平山甄萱反據 完山侵代伐太祖太祖不勝其強將欲出之萱兵圍王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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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