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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梁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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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양길(良吉)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신라
활동분야변란 > 모반인

[상세내용]

양길(梁吉)
생졸년 미상. 신라 진성여왕 때 반란을 주도한 적당(賊黨)의 괴수. 양길(良吉)이라고도 한다.

가계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실정이 겹치고 재해가 잇달아 일어났다.

889년(진성여왕 3)에 국고가 비게 되자, 왕은 사자(使者)를 지방에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한 것을 계기로 전국에 초적(草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원종(元宗)애노(哀奴)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도적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신라 중앙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러한 적당세력 중 손꼽을만한 자가 죽주(竹州: 지금의 죽산)기훤(箕萱)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양길이었다. 북원에 웅거한 양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궁예(弓裔)가 그의 부하로 들어와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추측될 수 있다.

892년 궁예기훤의 휘하에서 양길에게로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길의 세력이 크게 떨치지는 않았다.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를 습취한 뒤 스스로 왕이라 칭한 견훤(甄萱)양길에게 비장(碑將)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있다.

견훤의 그러한 행동이 선전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겠지만 상대적으로 양길의 세력도 그렇게 강하지 못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다가 궁예의 투항을 받고 난 뒤부터 양길의 세력은 점차 커졌다. 양길궁예를 우대하여 모든 일을 위임하였으며 군사를 나누어주어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였다.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로부터 주천(酒泉: 지금의 예천)내성(奈城: 지금의 영월)울오(鬱烏: 지금의 平昌)어진(御珍: 지금의 울진) 등의 현을 습격하여 항복을 받고, 894년에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모두 3,500명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8년조에는 궁예의 무리 600여명이 명주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이한 기록에 대해 600명은 궁예양길로부터 빌린 군대였을 것이며, 그들이 명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3,500명으로 불어났을 것으로 해석된다.

명주에 들어온 무리가 모두 양길의 직접적인 세력기반으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뒤 양길은 사실상 강원도일대에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어 궁예저족(猪足: 지금의 인제)생천(牲川: 지금의 양구)부약(天若: 지금의 춘천)금성(金城)철원 등지를 점령하니, 군세(軍勢)가 심히 강하여 패서(浿西)의 적들이 항복해오는 무리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점령한 지역들이 바로 양길의 세력권내에 흡수되었다기보다는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이때부터 궁예는 무리가 많고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왕이라 칭할만하다고 여겨 내외의 관직을 설정하였다. 곧 궁예양길의 휘하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을 구축하였고 송악군(松嶽郡: 지금의 개성)으로부터 왕건(王建)의 투항을 받으면서 후삼국시대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이때 양길북원에 있으면서 아직도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 등 30여성을 가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궁예의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다는 말을 들은 양길은 그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이 사실을 알아차린 궁예에게 오히려 습격당하여 크게 패하였다.

그뒤 양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양길의 세력권이 궁예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900년(효공왕 4) 왕건궁예의 명령을 받아 광주(廣州)충주당성(唐城: 지금의 남양)청주괴양(槐壤: 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한 뒤이다.

신라 하대가 되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였다. 처음 지방호족은 중앙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여 중앙정부와도 어느 정도 연결을 가지면서 독립된 세력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그들은 중앙왕실의 권위를 점차 인정하지 않게 되고, 초적의 발호는 이와같은 사태를 부채질하였다. 양길의 등장은 초적세력을 규합하여 신라 고대국가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양길은 붕괴되어가는 고대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경륜을 가진 자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양길은 초적 사이의 세력다툼에서도 패배하였다.

그가 궁예로 하여금 철원 등의 지역을 병합하게 하였지만 실제 그곳은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고, 나중에 궁예는 이 지방에 웅거하여 그에게 공공연한 적대행위를 자행하였다.

즉, 양길견훤신라조정과 적대관계라는 부담을 안고 북방의 궁예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後三國時代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