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유금필(庾黔弼)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20AE08D544D0941X0
시호(諡號)충절(忠節)
생년?(미상)
졸년941(태조 24)
시대고려전기
본관무송(茂松)
활동분야무신 > 무장
공신호개국공신

[상세내용]

유금필(庾黔弼)
미상∼941년(태조 24). 고려의 무장. 본관은 무송(茂松).

평주(平州, 지금의 황해도 평산)사람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920년(태조 3) 3월 북계(北界)골암진(鶻巖鎭)이 거듭하여 북적(北狄)에게 침략당하자 개정군(開定軍) 3,000명을 거느리고 가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성을 쌓고 북번(北蕃)의 추장 300인을 복종시켰다.

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 되어 후백제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임존군(任存郡: 예산군 대흥면)을 공격하여 군사 3,000여명을 살획하였다.

또한,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에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던 태조의 군사를 도와 견훤(甄萱)을 곤란하게 하였다.

928년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다가 후백제군사가 청주에서 태조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쳐부수고 독기진(禿歧鎭)까지 추격하여 300여기를 살획하였다.

929년 견훤고창군(古昌郡: 안동군)을 포위, 공격하자 많은 장수들이 진군을 망설였으나 홀로 결사적인 태도로 임하여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돌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931년에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후백제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략하므로 귀양지의 장정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하니, 태조가 그 충성에 감동하여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

933년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태조후백제군사로부터 신라서울을 구하라고 하므로 장사 8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라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후백제신검(神劍) 등을 만나 싸워서 크게 승리하고, 장군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7인을 사로잡고 살획함이 매우 많았다.

934년 태조운주(運州: 지금의 홍성)를 칠 때에는 경기(勁騎) 수천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000여명을 살획하였으며, 술사 종훈(宗訓)과 의사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최필(崔弼) 등을 사로잡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항복하게 하였다.

935년 나주후백제의 공격을 받자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이를 경략하였으며, 이듬해 고려후백제가 결전을 벌일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한설(朴漢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12-28『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유금필 항목을 참고하여 본관을 평산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