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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眞聖女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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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만(金曼)
시호(諡號)진성(眞聖)
생년?(미상)
졸년897(효공왕 1)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영화부인(寧花夫人)
조부김계명(金啓明)
조모광화부인(光和夫人)
묘소황산(黃山)

[상세내용]

진성여왕(眞聖女王)
미상∼897(효공왕1). 신라 제51대왕. 재위 887∼897년.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부친은 경문왕이고, 모친은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 헌강왕)황(晃: 정강왕)윤(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元宗)애노(哀奴)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 지금의 光州)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 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시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韓國硏究院, 1980)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