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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文聖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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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경응(金慶應)
생년?(미상)
졸년857(헌안왕 1)
시대통일신라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왕실 > 왕
정계부인(貞繼夫人)
조부김균정(金均貞)
조모진교부인(眞矯夫人)
소명왕후(炤明王后)

[상세내용]

문성왕(文聖王)
미상∼857년(헌안왕 1). 신라 제46대왕. 재위 839∼857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김경응(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모친은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김균정(金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김위흔(金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김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김인겸(金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김균정계의 김우징(金祐徵)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김양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김예징(金禮徵)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문성왕 3)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 노출에 불과하다.

846년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 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김양순(金良順)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김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의정시중김계명(金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