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유신(金庾信)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C720C2E0B0595X0
생년595(진평왕 17)
졸년673(문무왕 13)
시대통일신라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군인 > 장군
김서현(金舒玄)
만명부인(萬明夫人)
조부김무력(金武力)
외조부숙흘종(肅訖宗)

[상세내용]

김유신(金庾信)
595년(진평왕 17)∼673년(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구실을 한 장군
1. 왕실가계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김무력(金武力), 부친은 김서현(金舒玄)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모친은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부친은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 왕족출신과 통혼할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2. 전공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김춘추고구려에 청병하러 간 642년(선덕여왕 11), 종전에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로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에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 신라귀족들의 성향에서 보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미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무렵의 주(州)는 지방행정단위로서보다는 군사작전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에는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서 군사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뒤의 활약이 뚜렷이 나타난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쳐 50보쯤을 가서야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는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을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3. 반란진압과 영향력 확대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인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이치로써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계출신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운명을 결정함에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전투들의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647년(진덕여왕 1)과 648년의 전투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한 형태였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의 편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에서도 대장군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죽지(竹旨)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4. 무열왕 때의 전공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해 10월에 태종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짐의 반영인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쟁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에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은 문무왕의 즉위 뒤에도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倭)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어 평정하였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대신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의 생구관계(甥舅關係)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한 포상이 있었다.

그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음이 나타난다.
5. 당나라 계책 분쇄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소정방(蘇定方)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은 바 있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는 소정방이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같은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키는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

그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신라에 대해 노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같은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놓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한 것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金庾信家門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梨花史學硏究 13‧14合輯, 1983)

[집필자]

노명호(盧明鎬)
대표명김유신(金庾信)
유신(庾信)
성명김유신(金庾信)

명 : "유신(庾信)"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東國歷代總目v01戊寅是歲唐高祖滅隋卽帝位遣使朝唐○甲申唐遣使冊王○己丑金庾信攻陷高句麗娘臂城今淸州○庾信舒玄之子也率兵至娘臂城麗人逆擊之羅軍失利庾信爲中幢主謂其父曰庾信平生以忠信自期臨戰不可不勇乃跨馬突陣
東史撮要v1稷臨死憂諫不聽戒其子 瘞於王出畋路側王聞而流涕曰愛我深遂不復獵遣金舒玄 攻娘臂城今淸州將敗舒玄 之子庾信 謂其父曰兒以忠臣自期臨陣不可不勇乃策馬突陣斬將諸軍皆驚遂陷其城舒玄首露王 後潛通新羅宗室女萬明有脤
東史撮要v1曰兒以忠臣自期臨陣不可不勇乃策馬突陣斬將諸軍皆驚遂陷其城舒玄首露王 後潛通新羅宗室女萬明有脤二十月生庾信 背上有七星旣長慨然有削平諸國之志八入中岳石窟中作誓告天有老人授秘訣云遣使獻二美女于唐太宗 曰鸚鵡猶
駕洛三王事蹟考v2爲讓王死爲明神奇事異蹟揚靈千禩大爲一方之敬信則不宜陪食於伽藍之宮以受緇髡之饗是白乎旀其孫大將軍興武王庾信統一三韓誠心事大豊功偉烈照爛靑史功存生民在禮當祀又況此地遺躅赫赫如昨七年侍陵孝節兼彰則建祠崇饗之節及
駕洛三王事蹟考v2爲白去乎猗我天地父母仁覆之澤無所不被凡屬闕典小大俱擧臣矣身先祖駕洛國仇衡王之陵墓先祖新羅大將軍興武王庾信之遺跡亦蒙闡揚發揮一以明朝家之恩典一以遂遺裔之誠禮事己未九月二十一日金景穆等上言
駕洛三王事蹟考v2有寺知守護王陵故曰王山寺陵乃駕洛國第十葉仇衡王所瘞之玄宮寺乃王孫大角干金舒玄所建舒玄之子大將軍興武王庾信追立首露廟於王臺又建仇衡祠於玆寺所以薦祖父之冥路奉香火之願刹又新羅第三十王法敏制曰朕乃仇衡王之外孫遣
駕洛三王事蹟考v2哉往矣勉焉無隳乃事二公拜曰奉以周旋不敢失墮文武王旣與英公破平壤還到南漢州今廣州謂群臣曰昔百濟謀侵我國庾信之祖武力爲將逆擊之俘其王及宰相四人以拆其衡又其父爲梁州摠管屢與百濟戰使不得犯境故邊民安農桑之業君臣無
駕洛三王事蹟考v2曇等敗走追斬之夷其族眞德王元年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遂入唐乞師太宗皇帝曰聞爾國庾信之名其爲人也如何對曰庾信雖少有才智若不藉天威豈易除鄰患帝曰誠君子之國也乃勑將軍蘇定方以師二十萬徂征百濟時公爲押梁州今慶山軍主
駕洛三王事蹟考v2又不言公語之曰吾國王上不違天意下不失人心百姓欣然皆樂其業今爾見之往告而國人遂慰送之麗人聞之曰新羅雖小庾信爲相不可輕也唐高宗又遣蘇定方征高句麗金仁問受命來踰出兵會伐於是文武王率庾信等發大兵向高句麗有百濟殘賊
駕洛三王事蹟考v2人曰吾以庚辰夜吉夢得此兒宜以爲名然禮不以日月爲名庚與庾字相似辰與信聲相近況古之人有名庾信盍以名之遂名庾信公年十七見麗濟靺鞨侵軼國疆慷慨有削平之志獨入中嶽石窟今斷石山齋戒告天盟誓曰敵國無道爲豺虎以擾我封域略
駕洛三王事蹟考v2遂慰送之麗人聞之曰新羅雖小庾信爲相不可輕也唐高宗又遣蘇定方征高句麗金仁問受命來踰出兵會伐於是文武王率庾信等發大兵向高句麗有百濟殘賊屯瓮山今未詳城遮路公進兵圍之使人語賊將曰而國不龔致大國之討順命者賞不順命者
駕洛三王事蹟考v2邑二千戶捴章元年高宗遣李勣伐高句麗徵兵於我文武王出兵應之以公有疾留之乃命欽純仁問爲將欽純告王曰若不與庾信同行恐有後悔王曰公等皆國之寶若偕行萬一蹉趺其如國何留庾信守國則隱然若長城終無憂矣欽純公之弟仁問公之外
駕洛三王事蹟考v2以公有疾留之乃命欽純仁問爲將欽純告王曰若不與庾信同行恐有後悔王曰公等皆國之寶若偕行萬一蹉趺其如國何留庾信守國則隱然若長城終無憂矣欽純公之弟仁問公之外甥至是告于公曰吾等不才從王就不測之地願有指誨答曰夫將者國
駕洛三王事蹟考v2作神羞於是督諸將奮擊之毗曇等敗走追斬之夷其族眞德王元年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遂入唐乞師太宗皇帝曰聞爾國庾信之名其爲人也如何對曰庾信雖少有才智若不藉天威豈易除鄰患帝曰誠君子之國也乃勑將軍蘇定方以師二十萬徂征百
駕洛三王事蹟考v2得以行其志與上國協謀合三十一爲一家能以功名終焉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臯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若庾信則鄕人稱頌之至今不已士大夫知之可也至於芻童牧豎亦能知之則其爲人也必有以異於人矣金富軾三國史記金庾信論
駕洛三王事蹟考v2將逆擊之俘其王及宰相四人以拆其衡又其父爲梁州摠管屢與百濟戰使不得犯境故邊民安農桑之業君臣無宵旰之憂今庾信承祖考之業爲社稷之臣出將入相功績茂焉若不倚賴公之門國之存亡未可知也於是授公以太大舒發翰食邑五百戶仍賜
駕洛三王事蹟考v2賴公之門國之存亡未可知也於是授公以太大舒發翰食邑五百戶仍賜輿杖上殿不趨唐皇帝遣使宣慰濟師功亦授詔書於庾信褒奬之且諭入朝而不果行咸寧四年癸酉文武王十三年也妖星見地震王憂之公進曰今之變異厄在老臣王請勿憂王曰若
駕洛三王事蹟考v2而信無使小人參焉與賢者遊親而禮無使不肖預焉誠哉斯言也實爲君之要道也故書曰任賢勿貳去邢勿疑觀夫新羅之待庾信也親近而無間委任而不貳謀行言聽不使怨乎不以可謂得五六童蒙之吉故庾信得以行其志與上國協謀合三十一爲一家
駕洛三王事蹟考v2故書曰任賢勿貳去邢勿疑觀夫新羅之待庾信也親近而無間委任而不貳謀行言聽不使怨乎不以可謂得五六童蒙之吉故庾信得以行其志與上國協謀合三十一爲一家能以功名終焉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臯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若
駕洛三王事蹟考v2公諱庾信首露王十三世孫也初首露從金卵而生故以金爲姓首露開國於金官國傳國五百年至十世孫仇亥以國入新羅是爲公曾祖
駕洛三王事蹟考v2神異及欲定名謂夫人曰吾以庚辰夜吉夢得此兒宜以爲名然禮不以日月爲名庚與庾字相似辰與信聲相近況古之人有名庾信盍以名之遂名庾信公年十七見麗濟靺鞨侵軼國疆慷慨有削平之志獨入中嶽石窟今斷石山齋戒告天盟誓曰敵國無道爲
東寰錄v1石窟誓詞○金舒玄。首露王駕洛國後裔。潛通新羅宗室女萬明有娠。二十月而生金庾信。背有七星文。庾信見麗濟靺鞨侵軼國疆。慨然有削平之志。獨入中嶽石窟。作誓詞告天。有老人來授祕訣云。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