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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민(李俊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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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수(子修)
호(號)신암(新菴)
시호(諡號)효익(孝翼)
생년1524(중종 19)
졸년1590(선조 23)
시대조선전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공량(李公亮)

[상세내용]

이준민(李俊民)
1524년(중종 19)∼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참봉을 지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며, 영남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은 그의 외숙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고, 이어서 1554년 사간원정언이 되어서는 당시의 부허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을 경계하고, 경학을 장려하여 덕행을 권장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뒤 1556년에는 황해도사로서 중시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이듬해에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김진(金鎭)이명(李銘) 등과 함께 당시의 권신인 이량(李樑)에 의부하여 윤원형(尹元衡)일파를 축출하니, 사람들이 휼목(譎目)이라 하였다.

반대파의 미움을 사서 영월군수로 좌천되었고, 이어서 1561년 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으나, 관할구역인 대창역(大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변고가 일어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그뒤 세자시강원문학으로서 세자교육에 힘쓰다가 강계부사를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좌승지를 역임하고,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오랫동안 국방을 담당하였다.

그뒤 경기관찰사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575년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 북변을 잘 다스렸다.

그뒤 내직으로 옮겨 병조판서지의금부사의정부좌참찬을 지냈는데,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을 잘 처리하였다.

이때 조정의 공론이 분열하여 동인‧서인의 붕당이 일어나자 이를 매우 염려하였고,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를 존경하였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인들이 그를 탄핵, 공격하니, 이에 맞서 강경하게 그 불가함을 주장하여 의기를 보였다. 천품이 강직하여 사리에 닿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았다.

항상 검소하였고, 자제 교육에도 매우 엄하였다. 붕당의 논쟁이 심하여지자, 병을 칭탁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진주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