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득(趙仁得)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870C778B4DDD1598X0 |
| 자(字) | 덕보(德輔) |
| 호(號) | 창주(滄洲) |
| 생년 | ?(미상) |
| 졸년 | 1598(선조 31)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평양(平壤) |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 부 | 조경운(趙慶雲) |
| 외조부 | 김응무(金應武) |

[상세내용]
조인득(趙仁得)
미상∼1598년(선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덕보(德輔), 호는 창주(滄洲).
부친은 조경운(趙慶雲)이며, 모친은 김응무(金應武)의 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장령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관찰사로 해주 앞바다의 섬으로 피신하였다가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전직되었으며, 그뒤 판결사를 지냈다.
1594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비변사의 건의로 정병(精兵)을 모집하였으며, 이에 속오법(束伍法)이 최초로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당시 시급한 포수(砲手)양성에 노력하고 있던 각 지방군의 속오군화(束伍軍化)가 촉진되었다.
1595년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공조참판‧길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조경운(趙慶雲)이며, 모친은 김응무(金應武)의 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장령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관찰사로 해주 앞바다의 섬으로 피신하였다가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전직되었으며, 그뒤 판결사를 지냈다.
1594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비변사의 건의로 정병(精兵)을 모집하였으며, 이에 속오법(束伍法)이 최초로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당시 시급한 포수(砲手)양성에 노력하고 있던 각 지방군의 속오군화(束伍軍化)가 촉진되었다.
1595년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공조참판‧길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명 : "인득(仁得)"에 대한 용례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