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덕온(李德溫)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B355C628B1562X0
자(字)사화(士和)
호(號)귀촌(龜村)
생년1562(명종 17)
졸년1635(인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이뇌(李雷)
경주정씨(慶州鄭氏)
고조부이구(李璆)
외조부정한원(鄭漢元)
저서『구촌집』

[상세내용]

이덕온(李德溫)
1562년(명종 17)∼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화(士和), 호는 구촌(龜村).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현손으로, 호남군(湖南君) 이뇌(李雷)의 아들이며, 모친은 경주정씨(慶州鄭氏)군수 정한원(鄭漢元)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경까지 임금을 호종하고 세자책봉으로 민심을 수습하도록 건의하였다. 성균관학유에 임명되고, 세자를 용강으로 배종하였다.

그뒤 승문원박사주서를 지내고, 1593년 환도하여 호성훈(扈聖勳)을 받았다.

그뒤 예조병조낭관, 사예전적수찬필선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북청판관성주목사 등을 거쳐, 1606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비변책(備邊策)을 상소, 임금의 가납(嘉納)을 얻었다.

1607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박해하자 직간하여 대북파에 의하여 관작이 삭탈되었다. 구촌의 선영 아래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귀되었고, 곧 울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전심하였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에 임금이 공주까지 내려가자 나아가 호종하고 난이 평정되자 다시 병을 핑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저서로는 유집 20권과 유어(類語) 40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5권 2책의 『구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집필자]

조준하(趙駿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