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간(李弘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64DAC04B1486X0 |
자(字) | 대립(大立) |
호(號) | 쌍괴(雙槐) |
생년 | 1486(성종 17) |
졸년 | 1546(명종 1)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용인(龍仁)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효독(李孝篤) |
외조부 | 최명근(崔命根)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홍간(李弘幹)
1486년(성종 17)∼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대립(大立), 호는 쌍괴(雙槐).
부친은 사간 이효독(李孝篤)이며, 모친은 최명근(崔命根)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초수(初授), 곧 예문관에 들어가 1517년 11월 평안도평사로 파견될 때까지 검열‧대교‧봉교를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교유하면서 김정 등의 편협하고 과격함을 경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남곤(南袞)이 고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무랐다.
1520년 2월 사간원정언에 발탁되고 그뒤 홍문관교리, 세자시강원사서, 호조‧예조‧병조의 좌랑, 정랑, 세자시강원필선, 수원‧곤양‧옥천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527년 5월 사헌부장령으로 11월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1513년에 박영문(朴永文)‧신윤무(辛允武)의 옥사에 연루되어 찬축(竄逐)된 영산군(寧山君) 전(恮: 성종의 13남)을 세종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에 비겨 사면할 것을 청하여 방면하게 하였으나, 강직한 언론을 꺼려한 대신들의 배척으로 파직되었다. 곧 복직되어 사옹원(司饔院)‧군기시(軍器寺)‧종부시(宗簿寺)의 정(正)과 공주‧청주‧광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1543년경 봉상시정(奉常寺正), 1545년(명종 즉위) 11월 인종의 빈전도감사(殯殿都監事)에 참여한 공로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고, 다음해 12월 동지부사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사류하(沙流河)에서 죽었다.
효행‧학행과 강직한 언사로 명망이 있었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20여년간에 걸쳐 외관으로 재직하면서 선치를 행하였다.
부친은 사간 이효독(李孝篤)이며, 모친은 최명근(崔命根)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초수(初授), 곧 예문관에 들어가 1517년 11월 평안도평사로 파견될 때까지 검열‧대교‧봉교를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교유하면서 김정 등의 편협하고 과격함을 경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남곤(南袞)이 고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무랐다.
1520년 2월 사간원정언에 발탁되고 그뒤 홍문관교리, 세자시강원사서, 호조‧예조‧병조의 좌랑, 정랑, 세자시강원필선, 수원‧곤양‧옥천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527년 5월 사헌부장령으로 11월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1513년에 박영문(朴永文)‧신윤무(辛允武)의 옥사에 연루되어 찬축(竄逐)된 영산군(寧山君) 전(恮: 성종의 13남)을 세종이 양녕대군을 방면한 고사에 비겨 사면할 것을 청하여 방면하게 하였으나, 강직한 언론을 꺼려한 대신들의 배척으로 파직되었다. 곧 복직되어 사옹원(司饔院)‧군기시(軍器寺)‧종부시(宗簿寺)의 정(正)과 공주‧청주‧광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1543년경 봉상시정(奉常寺正), 1545년(명종 즉위) 11월 인종의 빈전도감사(殯殿都監事)에 참여한 공로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고, 다음해 12월 동지부사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도중 사류하(沙流河)에서 죽었다.
효행‧학행과 강직한 언사로 명망이 있었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20여년간에 걸쳐 외관으로 재직하면서 선치를 행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明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명 : "홍간(弘幹)"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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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