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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수(金若水)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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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두전(金枓全)
이명(異名)김두희(金枓熙)
생년1892(고종 29)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기타
출생지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상세내용]

김약수(金若水)
1892년(고종 29)∼미상. 노동운동가‧정치가. 김두전(金枓全) 또는 김두희(金枓熙)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출생.

서울의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에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해 김원봉(金元鳳)이여성(李如星) 등과 함께 만주상해를 거쳐 난징(南京)에서 징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김원봉과 헤어져 이여성과 함께 귀국하였다.

1920년 9월에는 박중화(朴重華)박이규(朴珥圭)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창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적을 두고 1921년 11월 무정부주의자 박렬(朴烈)장상중(張祥重)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으나, 사상적 대립으로 따로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여 기관지 『척후대』『대중시보』 등을 발간하는 한편, 조선고학생동우회에도 관계하다가 1922년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이헌(李憲)김종범(金鍾範)마명(馬鳴) 등과 함께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여 이후 국내사회주의운동의 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다.

192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내에 잠입한 정재달(鄭在達)과 접촉하여 구금되기도 하였으며, 1924년 4월에는 김사국(金思國)신백우(申伯雨)이영(李英)정백(鄭栢) 등과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및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조동우(趙東祐)정운해(鄭雲海)김종범신철(辛鐵) 등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1926년 체포되어 1931년까지 복역하였다.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대중(大衆)』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으나, 구금과 탄압으로 폐간하고, 친일단체인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에 불응하여 여러 번 구금당하였으며, 좌익계의 모사(謀士)라는 평을 듣는 가운데 일제시대에 총 9년7개월간이나 복역하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반대하는 한국민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무기휴회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한국민주당이 좌우합작위원회의 토지정책을 반대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1946년 10월 탈당하여 김규식(金奎植)을 총재로 한 민중동맹(民衆同盟)의 창설에 참여하여 상임위원직을 맡음으로써 중간파노선을 취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지명되었다. 1947년 5월에는 나승규(羅承奎) 등과 분쟁이 생겨 민중동맹에서 탈퇴, 조선공화당을 창당하고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5‧10총선거 때 경상남도 동래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의원에 당선, 초대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소장파의원의 지도적 구실을 하다가, 1949년 6월 남로당국회푸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하던 중 6‧25사변이 일어나자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1955년에는 북한의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입교하였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59년 반당반혁명분자로 숙청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史 2(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0)
韓國現代政治史 Ⅰ(宋南憲, 韓國史料硏究所, 1980)

[집필자]

김남식(金南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