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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李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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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0(고종 27)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공산주의 운동가
출생지함경남도 북청

[상세내용]

이영(李英)
1890년∼미상. 공산주의 운동가‧정치가. 함경남도 북청 출생.

경성사립오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경 중국 난징의 장닝제일실업학교(江寧第一實業學校)를 졸업하였다.

학생시절에 만주의 철혈광복회와 합동하게 되는 조선광복회를 조직하였으며, 일시적으로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대구노동공제회‧김해청년회 등의 단체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연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3년 서울청년회와 관계하였던 김사국(金思國)정재달(鄭在達) 등과 공산주의 서클활동을 하였는데, 10월 국제청년일을 기하여 서울청년회의 한진교(韓鎭敎)장채극(張彩極)임봉순(任鳳順) 등과 함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24년 서울계 조선공산당 창건멤버로 선전통신부장을 맡았으며, 이해 조선청년총동맹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정백(鄭栢)최창익(崔昌益)한빈(韓彬) 등과 함께 신민부사건 연루자로, 1926년 상해의 공산주의자와 연락한 혐의로 검거되기도 하였다.

김사국이 죽자 1927년 제4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6월 일본경찰에 잡혀 1932년까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즉시 북청을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여 1933년 1월 박형병(朴衡秉)정백신철호(辛哲鎬) 등 100여명이 관련된 북청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다. 이후 1935년 동아일보사 경원지국장에 부임하였으며, 공산주의 운동권에서 이탈하여 향리에서 은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최초로 조선공산당 장안파를 조직하였으나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창당으로 인하여 이에 흡수되었다.

9월 6일 갑작스럽게 소집된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고문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결성된 반일운동자구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2월 좌익단체의 연합체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상임위원, 3월에 경상북도민전사무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할 때 참여하지 않고, 1946년 여운형(呂運亨)백남운(白南雲)강진(姜進)최익한(崔益翰) 등과 함께 사회노동당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5월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사회노동당 세력으로 구성된 근로인민당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월북, 1948년 9월∼1953년 12월까지 최고인민회의의장을 지냈고, 1957년 12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 겸 의장단 의장을 지냈으나 1959년 해임되었다.

[참고문헌]

解放前後의 朝鮮眞相 2(金鎭範‧金東雲, 朝鮮政經硏究社, 1945)
韓國共産主義運動史 3(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집필자]

김남식(金南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