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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국(金思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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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김해광(金解光)
생년1892(고종 29)
졸년1926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사회주의자
출신지충청남도 논산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사국(金思國)
1892년(고종 29)∼1926년. 사회주의운동가. 충청남도 논산 출신. 별명 김해광(金解光).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0년 강제합병 이후 만주시베리아를 유랑하였으며 1919년 국민대회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 창립된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하고, 4월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 위원, 조선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1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 직후 『오일신보(五一新報)』의 발기 및 흑도회(黑濤會) 결성을 주도하고, 또한 12월 재일유학생 중심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하였다.

1922년 봄 일본에서 귀국하자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이에 따라 그는 1922년 3월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의 관련자인 장덕수(張德秀)김명식(金明植)박이규(朴珥圭) 등의 제명을 제안하고, 이영(李英)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의 18개 단체의 연합회 탈퇴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좌우세력의 불분명한 관계가 명확해지는 하나의 계기였다.

또한, 1922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대회 때 차금봉(車今奉)과 손잡고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0월 25일 자유노동자대회의 개최와 자유노동조합의 발기총회의 개최 등을 지도하였다.

1922년 11월 신생활사(新生活社)필화사건을 계기로 다음해 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1924년 용정(龍井)에 동양학원(東洋學院), 영고탑(寧古塔)에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사회주의 이념의 전파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중 국관헌의 탄압으로 재차 러시아로 망명하였지만 폐병이 악화되자 1924년 6월 귀국하여 조선청년 동맹에서 일하면서 10월 고려공산동맹의 결성을 주도하고 스스로 조직부 및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의 양대산맥이 형성되었다.

이후 그는 1924년 12월 6일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7일에 결성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반대단체 전국연합위원회 연구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선두에서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는 파벌투쟁을 전개 하였다.

[참고문헌]

現代史資料 29(姜德相, みすず書房, 1972)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청계연구소, 1986)

[집필자]

신주백(辛珠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