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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金在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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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0(고종 27)
졸년1944
시대항일기
활동분야사회 > 공산주의 운동가
출신지경상북도 안동

[상세내용]

김재봉(金在鳳)
1890년(고종 27)∼1944년. 공산주의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08년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공업강습소 염직과 3년을 마쳤다.

1920년 『해주일보(海州日報)』 경성지사에서 기자생활을 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이쇼(大正)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는데, 이때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사상을 전환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참가하였으며, 귀국하는 길에 치타에 있는 한인소학교의 교사로 잠시 근무하다 그해 11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연합대회에 참가하면서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였다.

1923년 5월 당과 공청(共靑)을 조직하라는 코르뷰로(高麗局)의 지시를 받고 경성에 돌아와 김찬(金燦)의 소개로 신백우(申伯雨)원우관(元友觀)윤덕병(尹德炳)이영(李英)임봉순(任鳳淳)김유인(金裕寅) 등과 접촉하였다.

이들은 각파 통일의 기초 위에서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서울청년회계열이 이를 거부하자, 그해 6월 신철(辛鐵), 상해파(上海派)의 이봉수(李鳳洙),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의 윤덕병‧신백우, 북성회(北星會)의 김약수(金若水),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의 원우관 등과 김찬 집에 모여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그는 당조직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후 코르뷰로 국내부에서는 1923년 7월 표면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 9월부터 각 지방의 순회강연 및 각 지역의 기존단체들과의 연계를 통한 연결고리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 가운데 하나가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의 결성이다.

한편, 김재봉 등은 1925년 4월 경성부 황금정에 있는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서 조선공산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비서부위원겸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가 지도하던 ‘제1차조선공산당’은 조동호(趙東祜)가 기초한 당의 강령 및 규약의 토의, 조동호조봉암(曺奉巖)의 코민테른 파견, 조선노동총동맹의 분리 결정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1차조선공산당’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와해되었으며, 책임비서인 그는 12월 뒷일을 강달영(姜達永) 등 5인의 후계간부에게 일임한 직후 검거되어 6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참고문헌]

現代史資料 29(姜德相, みすず書房, 1972)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5(金俊燁‧金昌順, 청계연구소, 1986)

[집필자]

신주백(辛珠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