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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李弼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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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69(고종 6)
졸년1942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경기도 고양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필주(李弼柱)
1869년(고종 6)∼1942년.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경기도 고양 출신.

선천적인 무관성격으로 20세에 한국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군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종로청년회관(YMCA)의 초대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의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신자로서 미신타파와 계급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뒤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3‧1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에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咸台永)최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三‧一運動秘史(李炳憲, 時事時報社, 1959)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