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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朴熙道)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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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89(고종 26)
졸년1951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박계근(朴桂根)
출신지황해도 해주

[상세내용]

박희도(朴熙道)
1889년(고종 26)∼1951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황해도 해주 출신. 박계근(朴桂根)의 아들이다.

해주 의창(懿昌)학교 보통과와 고등과 졸업, 1904년 기독교인이 되어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앙유치원과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이 되었다.

1916년 6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지금의 서울 YMCA)의 회원 확대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였으며, 1918년 6월 감리교 창의문밖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9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부 간사로 취임하였다.

그해 12월 초순 일본 유학생 대표 송계백(宋繼白)을 통하여 알게 된 2‧8독립운동의 계획과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선언을 듣고 1919년 1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원부 위원인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과 의논하여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 각 학교 학생대표를 대관원(大觀園)에서 만나 국내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동전개를 꾀하다가 전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발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뒤 천도교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족적인 민족운동 계획을 추진, 기독교대표들이 회동하였으나 일시 좌절의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2월 22일 이승훈(李承薰)오화영(吳華英)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안세환(安世桓) 등이 모인 비밀회의에서 합동할 것을 최종 결정하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태화관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날 경무총감부의 유치장에 구금, 2년형의 옥고를 치른 뒤 중앙유치원의 원감을 지내면서 잡지 『신생활』을 창간, 1922년 11월 13호의 기사로 3년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었다.

1924년말 출옥한 뒤 독립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민족분단정책에 의한 1939년 이후의 친일경향으로 광복 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一運動秘史(李炳憲, 時事時報社, 1959)
韓國基督敎史硏究(金良善, 基督敎文化社, 1971)
韓國基督敎史(李永獻, 컨콜디아사, 1978)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78)

[집필자]

전택부(全澤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