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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李甲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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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연당(硏堂)
생년1889(고종 26)
졸년1981
시대항일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대구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이갑성(李甲成)
1889년(고종 26)∼1981년.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연당(硏堂). 대구 출신.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의 학생중심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의약(醫藥)의 지배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YMCA의 이사가 되어 항일청년운동을 지도하였다.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역임하고같은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뒤 귀국하여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바로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를 결성, 회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협력,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이범석(李範奭)의 족청계가 양우정(梁又正)을 통하여 국민회 파괴공작을 시도하였을 때 이에 저항하여 자유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족청계가 숙청된 뒤 상처투성이가 된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이 되어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같은해 33인 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생활을 하였고,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 때에는 그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하였고, 같은해 이준열사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총재로 활약하는 한편,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또한 3‧1운동의 기념비적 인물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를 지켜보다가 여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之血史(朴殷植, 維新社, 1920)
韓國獨立運動史 2(國史編纂委員會, 1966)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歷代國會議員總覽(韓國國會人物史編纂會, 租稅公論社, 1983)

[이미지]

[집필자]

권영대(權寧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