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풍(朴基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AE30D48DU9999X0 |
자(字) | 여유(汝有)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박성(朴聖) |
[상세내용]
박기풍(朴基豊)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유(汝有). 부사 박성(朴聖)의 아들이다.
1777년(정조 1) 무과에 급제, 1780년에 선전관이 되었고, 1800년(순조 즉위) 함경북도절도사, 1807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총부부총관으로 양서순무중군(兩西巡撫中軍) 겸 선봉장이 되어 청천강 이북의 각 고을을 회복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정주성을 네번이나 공격하여 전세는 유리하였으나 그의 성격이 유약하여 규율을 잡지 못하고 모두 실패하였으므로, 홍문관의 소핵(疏劾)을 당하고 그 대신 유효원(柳孝源)을 교대하여 마침내 파성하게 되었다.
그뒤 1813년 좌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15년 이후 좌우포도대장, 1821년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1823년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777년(정조 1) 무과에 급제, 1780년에 선전관이 되었고, 1800년(순조 즉위) 함경북도절도사, 1807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총부부총관으로 양서순무중군(兩西巡撫中軍) 겸 선봉장이 되어 청천강 이북의 각 고을을 회복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정주성을 네번이나 공격하여 전세는 유리하였으나 그의 성격이 유약하여 규율을 잡지 못하고 모두 실패하였으므로, 홍문관의 소핵(疏劾)을 당하고 그 대신 유효원(柳孝源)을 교대하여 마침내 파성하게 되었다.
그뒤 1813년 좌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15년 이후 좌우포도대장, 1821년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1823년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紀年便攷
純祖實錄
紀年便攷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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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