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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李在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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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90(고종 27)
졸년1910(융희 4)
시대항일기
본관진안(鎭安)
활동분야의료 > 의료인
출신지평안북도 선천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이재명(李在明)
1890년(고종 27)∼1910년. 한말의 의사. 본관은 진안(鎭安). 평안북도 선천 출신.

8세 때 평양 아청리(衙聽里)로 이사하였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의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갔으나, 곧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동경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 1909년 1월 전통감 이토(伊藤博文)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하기로 되었을 때 이토를 암살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중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갔다.

그뒤 안중근(安重根)에 의하여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친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먼저 없애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이재명이, 이용구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이동수(李東秀)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그해 9월 상경,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군밤장수로 변장하여 교회당 문밖에서 밤을 굽고 있다가, 오전 11시 30분경에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것을 칼로 허리와 어깨 등을 세번이나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게 왼쪽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하여 열렬한 언변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 “는 연설을 하는가 하면, 일본인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하고 고함을 쳤다.

그뒤 재판이 계속되어 재판장이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물어 “2000만 민족이다. “ 하고 말하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을 호령하여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어서 공소하였으나 사형이 확정되자, 재판장을 꾸짖어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 의거에 공모한 조창호(趙昌鎬)이동수김정익은 징역 15년, 김태선(金泰善)김병록(金炳祿)김용문(金龍文)은 징역 10년, 박태은(朴泰殷)은 징역 7년, 김이걸(金履杰)이응삼(李應三)김동현(金東鉉)은 징역 5년, 이연수(李年遂)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이동수는 도피하였다가 그뒤 잡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每日申報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이재명의 행적(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집필자]

정원옥(丁原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31사단법인 이재명의사 추모사업회의 자료에 의거해 본관을 미상에서 진안(鎭安)으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