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걸(金履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774AC78B1884X0 |
생년 | 1884(고종 21) |
졸년 | 1950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호국 > 독립운동가 |
출신지 | 평안남도 대동(大同) |
공훈 | 건국포장 |
[상세내용]
김이걸(金履杰)
1884년(고종 21)∼1950년. 독립운동가. 평안남도 대동(大同) 출신.
소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일진회원(一進會員)을 비롯한 매국노들의 망국행위에 분개, 1908년 3월 배일운동을 계획하였다.
1909년 10월 이재명(李在明)‧이동수(李東秀)‧김정익(金貞益) 등과 친일파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 3인을 처단하기로 계획, 거사에 필요한 권총을 제공하는 등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해 11월 이재명의 거사 이후 곧 일본경찰에 붙잡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인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의용단에 가입,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소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일진회원(一進會員)을 비롯한 매국노들의 망국행위에 분개, 1908년 3월 배일운동을 계획하였다.
1909년 10월 이재명(李在明)‧이동수(李東秀)‧김정익(金貞益) 등과 친일파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 3인을 처단하기로 계획, 거사에 필요한 권총을 제공하는 등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해 11월 이재명의 거사 이후 곧 일본경찰에 붙잡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인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 항일운동의 기세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의용단에 가입,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집필자]
조동걸(趙東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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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