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극(李載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ACADF9B1864X0 |
생년 | 1864(고종 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연응(李沇應) |
[상세내용]
이재극(李載克)
1864년(고종 1)∼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예조판서 이연응(李沇應)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주어지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민비의 장례시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았으며, 1893년 유학(幼學)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895년 비서감우비서랑(祕書監右祕書郞)‧왕태자궁우시독관(王太子宮右侍讀官)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규장원교서(奎章院敎書)‧경연원시독(經筵院侍讀)‧장례원장례(章禮院章禮) 등을 지냈다.
1897년 규장각직각‧비서원승을 지내며 원구고제시(圓丘告祭時)에는 선표관장례(宣表官章禮)를 맡았고, 이듬해 흥선대원군 상례 때 지문서사관(誌文書寫官)을 담당하였고, 중추원의관‧시강원부첨사(侍講院副詹事)‧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등을 거쳐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어 칙임관4등이 주어졌다가 홍릉제조(洪陵提調)‧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시강원첨사‧종정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경효전 전작례시(奠酌禮時)는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여하여 가자되었고, 내부협판에 임명되어 칙임관3등이 주어졌으며, 이어 서리내부대신사무(署理內部大臣事務)를 맡았다가 의정부참찬으로 칙임관2등이 주어지고 시강원첨사를 겸임하였다.
1900년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외직에 나갔으며, 이듬해 궁내부특진관을 거친 뒤 비서원경을 지냈다.
1902년 의정부찬정이 되어 칙임관1등이 주어지고 궁내부특진관‧비서원경‧장례원경‧태의원경(太醫院卿)‧시종원경(侍從院卿)‧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등을 두루 역임한 뒤 법부대신에 임명되어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등과 함께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翊)의 탄핵을 상주하였다.
1903년 법부대신으로서 규장각학사‧시강원일강관‧비서원경 등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도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 등을 겸임하였으며, 법부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김종한(金宗漢)‧임건상(林建相)사건 등을 심리하고 왕명을 받아 여러 차례에 걸쳐 특사를 시행하였다.
이해 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경상북도관찰사를 맡은 뒤 의정부찬정‧임시서리 법부대신‧평리원재판장사무 등을 거쳐 학부대신에 기용되어,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유학생에 학자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유학생을 전원 소환하였고, 일본시찰학문상제도급사무(日本視察學問上制度及事務)로서 일본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일본천황에게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으며, 그밖에도 종정원경‧관제이정소의정관(管制釐正所議定官)‧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 등을 겸임하였다.
1905년에도 제실제도정리국 의정관과 동국 총재(總裁)를 겸임하였고, 그해 훈이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이 주어졌으며 임시서리내부대신사무‧예식원장례경 등을 지내고 궁내부대신이 되어 훈일등팔괘장(勳一等八掛章)이 서훈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시에는 왕실의 종친으로 궁내의 동정을 탐지하여 친일파에게 제공하는 등 조약체결에 협조하여 지탄을 받았다.
1906년 부묘도감제조(柎廟都監提調)로 활약하여 가자되었고, 궁내부대신으로서 태극장을 수여받았으며 경효전제조에 임명되어 표훈원의정관‧시강원첨사 등을 겸하였고 이어 수학원장이 되어 경효전제조‧임시서리적십자사총재사무(臨時署理赤十字社總裁事務)‧제실재정회의의원(帝室財政會議議員)‧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등을 겸임하였다.
1907년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궁내부대신‧수학원장‧표훈원총재 등을 지냈으며, 대원비신도비문서사관(大院妃神道碑文書寫官)을 맡기도 하였다. 그해 나철(羅喆) 등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로 하였을 때 매국노로 지목을 받아 서태운(徐泰運)외에 수명의 결사대가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합방 후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이 주어졌다.
1919년에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에 임명되어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예조판서 이연응(李沇應)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주어지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민비의 장례시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았으며, 1893년 유학(幼學)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895년 비서감우비서랑(祕書監右祕書郞)‧왕태자궁우시독관(王太子宮右侍讀官)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규장원교서(奎章院敎書)‧경연원시독(經筵院侍讀)‧장례원장례(章禮院章禮) 등을 지냈다.
1897년 규장각직각‧비서원승을 지내며 원구고제시(圓丘告祭時)에는 선표관장례(宣表官章禮)를 맡았고, 이듬해 흥선대원군 상례 때 지문서사관(誌文書寫官)을 담당하였고, 중추원의관‧시강원부첨사(侍講院副詹事)‧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등을 거쳐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어 칙임관4등이 주어졌다가 홍릉제조(洪陵提調)‧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시강원첨사‧종정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경효전 전작례시(奠酌禮時)는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여하여 가자되었고, 내부협판에 임명되어 칙임관3등이 주어졌으며, 이어 서리내부대신사무(署理內部大臣事務)를 맡았다가 의정부참찬으로 칙임관2등이 주어지고 시강원첨사를 겸임하였다.
1900년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외직에 나갔으며, 이듬해 궁내부특진관을 거친 뒤 비서원경을 지냈다.
1902년 의정부찬정이 되어 칙임관1등이 주어지고 궁내부특진관‧비서원경‧장례원경‧태의원경(太醫院卿)‧시종원경(侍從院卿)‧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등을 두루 역임한 뒤 법부대신에 임명되어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등과 함께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翊)의 탄핵을 상주하였다.
1903년 법부대신으로서 규장각학사‧시강원일강관‧비서원경 등을 겸하였다.
이듬해에도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 등을 겸임하였으며, 법부대신으로 재직하는 동안 김종한(金宗漢)‧임건상(林建相)사건 등을 심리하고 왕명을 받아 여러 차례에 걸쳐 특사를 시행하였다.
이해 내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경상북도관찰사를 맡은 뒤 의정부찬정‧임시서리 법부대신‧평리원재판장사무 등을 거쳐 학부대신에 기용되어,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유학생에 학자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유학생을 전원 소환하였고, 일본시찰학문상제도급사무(日本視察學問上制度及事務)로서 일본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일본천황에게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으며, 그밖에도 종정원경‧관제이정소의정관(管制釐正所議定官)‧임시서리궁내부대신사무 등을 겸임하였다.
1905년에도 제실제도정리국 의정관과 동국 총재(總裁)를 겸임하였고, 그해 훈이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이 주어졌으며 임시서리내부대신사무‧예식원장례경 등을 지내고 궁내부대신이 되어 훈일등팔괘장(勳一等八掛章)이 서훈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시에는 왕실의 종친으로 궁내의 동정을 탐지하여 친일파에게 제공하는 등 조약체결에 협조하여 지탄을 받았다.
1906년 부묘도감제조(柎廟都監提調)로 활약하여 가자되었고, 궁내부대신으로서 태극장을 수여받았으며 경효전제조에 임명되어 표훈원의정관‧시강원첨사 등을 겸하였고 이어 수학원장이 되어 경효전제조‧임시서리적십자사총재사무(臨時署理赤十字社總裁事務)‧제실재정회의의원(帝室財政會議議員)‧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등을 겸임하였다.
1907년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궁내부대신‧수학원장‧표훈원총재 등을 지냈으며, 대원비신도비문서사관(大院妃神道碑文書寫官)을 맡기도 하였다. 그해 나철(羅喆) 등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로 하였을 때 매국노로 지목을 받아 서태운(徐泰運)외에 수명의 결사대가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합방 후 일본정부에 의하여 남작이 주어졌다.
1919년에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에 임명되어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純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文品案
大韓季年史
日省錄
承政院日記
國朝榜目
文品案
大韓季年史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명 : "재극(載克)"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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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