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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식(洪萬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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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헌(伯憲)
호(號)호운(湖雲)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842(헌종 8)
졸년1905(광무 9)
시대조선후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호국 > 지사
홍순경(洪淳敬)
생부홍순목(洪淳穆)
출생지서울

[상세내용]

홍만식(洪萬植)
1842년(헌종 8)∼1905년. 한말의 애국지사.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서울 출생.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이며 홍영식(洪英植)의 형으로, 교관(敎官) 홍순경(洪淳敬)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그러나 1884년 아버지 홍순목이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자 이때 관직을 사직하였다. 같은해 동생 홍영식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894년 관직에 복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방제도 개혁 때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해 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리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음독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4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얼마 후 찬정(贊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상소 때마다 직함을 쓰지 않고, 다만 ‘미사신(未死臣)’이라고 써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 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季年史
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집필자]

신재홍(申載洪)
대표명홍만식(洪萬植)
성명홍만식(洪萬植)

성명 : "홍만식(洪萬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景孝殿郎廳先生案 參判 洪萬植 壬午二月初五日政拜
文蔭陞資錄v1同副承旨洪萬植壬午正月十一日王世子入學時禮房承旨
外案李敦夏 甲戌五谷山來 承旨 洪萬植 乙亥七拜 承旨 趙臣熙 丁丑十一拜 換定州 洪淳
外案 任商準 甲午九 廢 春川府 觀察使 乙未閏五設 洪萬植 李根命 乙未七 疏 曺寅承 建陽元一 被害
王世子冊禮謄錄(純宗)n1-1책竝依判下施賞 一以陳賀時各差備官以下別單傳曰宣敎官洪萬植加資展敎官兵曹正郞姜 永壽兵曹佐郞金鼎燮宣箋官司成
禁衛營謄錄n1-121책 庚午十二月二十二日 啓曰本營軍色從事官洪萬植身病甚重勢難察任今姑改差何如軍色從事官望洪萬植改差
禁衛營謄錄n1-121책事官洪萬植身病甚重勢難察任今姑改差何如軍色從事官望洪萬植改差代○檢詳金奎軾副司果金永稷前正言李源逸講政府啓
咸鏡監營啓錄n1-6책光緖八年正月十八日 承政院開坼今正月初八日同副承旨洪萬植成貼有旨內卿 以上疏上送事馳啓矣省疏具悉卿其勿辭益
東國續修文獻錄v1乙巳節義太上朝與日本新條約後立節閔泳煥文若桂庭驪興人文輔國贈議政忠正公旌趙秉世見相臣旌洪萬植伯憲南陽人文參判贈參政忠貞公旌宋秉璿見儒林旌崔益鉉見儒林李象哲全州人贈內協李康年全州人擧義被殺李儁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