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순(南廷順)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C815C21CB1819X0 |
이명(異名) | 종순(鍾順) |
자(字) | 성휴(聖休) |
시호(諡號) | 효정(孝貞) |
생년 | 1819(순조 19)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의령(宜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남영중(南英中) |
조부 | 남이익(南履翼)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남정순(南廷順)
1819년(순조 19)∼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초명은 남종순(南鍾順), 자는 성휴(聖休). 남영중(南英中)의 아들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철종 때 동래‧이천의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가 시작될 무렵 우승지로서 문중(門中)의 현직관리들과 함께 천주교도의 대표격으로 지목되어 체포당한 전 승지(承旨) 남종삼(南鍾三)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남종삼사건 이후 주위의 오해를 피하려고 1867년부터 종순이라는 초명을 정순으로 바꾼 듯하다.
그뒤 대사간‧이조참판‧호조참판‧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7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관찰사 재임중 당시 성행하던 청국선(淸國船)의 밀무역을 막는 데 공헌하였으나, 사소한 행정상의 실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당하였다.
그뒤 각각 두 차례에 걸쳐 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또한 강원도관찰사‧함경도안무사‧공조판서 등을 거쳐 189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함경도안무사로 있을 때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종래 유명무실하던 영포군(營砲軍)을 정비하였으며 길주민란을 진압하였다.
할아버지인 남이익(南履翼)과 함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철종 때 동래‧이천의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가 시작될 무렵 우승지로서 문중(門中)의 현직관리들과 함께 천주교도의 대표격으로 지목되어 체포당한 전 승지(承旨) 남종삼(南鍾三)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남종삼사건 이후 주위의 오해를 피하려고 1867년부터 종순이라는 초명을 정순으로 바꾼 듯하다.
그뒤 대사간‧이조참판‧호조참판‧규장각직제학을 거쳐 1872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관찰사 재임중 당시 성행하던 청국선(淸國船)의 밀무역을 막는 데 공헌하였으나, 사소한 행정상의 실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당하였다.
그뒤 각각 두 차례에 걸쳐 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또한 강원도관찰사‧함경도안무사‧공조판서 등을 거쳐 189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함경도안무사로 있을 때 국방력의 강화를 위하여 종래 유명무실하던 영포군(營砲軍)을 정비하였으며 길주민란을 진압하였다.
할아버지인 남이익(南履翼)과 함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高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이상찬(李相燦)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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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