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철(李漢喆)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55CCCA0B1808X0 |
자(字) | 자상(子常) |
호(號) | 희원(喜園) |
호(號) | 송석(松石) |
생년 | 1808(순조 8)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안산(安山[京]) |
활동분야 | 미술 > 화가 |

부 | 이의양(李義養)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한철(李漢喆)
1808년(순조 8)∼미상.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안산(安山[京]). 자는 자상(子常), 호는 희원(希園, 喜園) 또는 송석(松石).
화원(畵員)이었던 이의양(李義養)의 아들이다. 그도 화원이었으며 군수를 지냈다.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으며, 1852년 철종어진도사에, 1861년 철종어진 원유관본도사(遠遊冠本圖寫)에, 그리고 1872년 고종어진도사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초상(肖像)실력 때문에 조중묵(趙重黙)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다.
그는 전기(田琦)‧김수철(金秀哲)‧허유(許維)‧유숙(劉淑)‧조중묵‧유재소(劉在韶)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의 화평(畵評)을 통하여 그림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에 대하여 김정희는 비록 출진(出塵)의 상(想)이 모자라나 초초(楚楚)하여 풍치가 있다고 하였으며 또 묵법(墨法)이 몸에 익어 있다고 하였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산수‧인물‧화조(花鳥)‧절지(折枝)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대체로 전형적인 남종화법(南宗畵法)과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바위‧인물‧나무의 묘사에서 특히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부드럽고 투명한 필치의 사용, 묵법의 강약, 농담(濃淡)의 사용 등에서는 그의 탁월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대표작으로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김정희영정」(1857, 金聲基 소장)과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화원(畵員)이었던 이의양(李義養)의 아들이다. 그도 화원이었으며 군수를 지냈다.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였으며, 1852년 철종어진도사에, 1861년 철종어진 원유관본도사(遠遊冠本圖寫)에, 그리고 1872년 고종어진도사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초상(肖像)실력 때문에 조중묵(趙重黙)과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쌍벽으로 지칭되었다.
그는 전기(田琦)‧김수철(金秀哲)‧허유(許維)‧유숙(劉淑)‧조중묵‧유재소(劉在韶) 등과 함께 김정희(金正喜)의 화평(畵評)을 통하여 그림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에 대하여 김정희는 비록 출진(出塵)의 상(想)이 모자라나 초초(楚楚)하여 풍치가 있다고 하였으며 또 묵법(墨法)이 몸에 익어 있다고 하였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산수‧인물‧화조(花鳥)‧절지(折枝)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대체로 전형적인 남종화법(南宗畵法)과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바위‧인물‧나무의 묘사에서 특히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부드럽고 투명한 필치의 사용, 묵법의 강약, 농담(濃淡)의 사용 등에서는 그의 탁월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대표작으로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김정희영정」(1857, 金聲基 소장)과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의 美 12―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0)
韓國의 肖像畵(趙善美, 悅話堂, 1982)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의 美 12―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0)
韓國의 肖像畵(趙善美, 悅話堂, 1982)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대표명 | 이한철(李漢喆) |
성명 | 이한철(李漢喆) |
성명 : "이한철(李漢喆)"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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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