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홍도(金弘道)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D64DB3C4B1745X0
자(字)사능(士能)
호(號)단원(檀園)
호(號)단구(丹邱)
호(號)서호(西湖)
호(號)취화사(醉畵士)
호(號)고면거사(高眠居士)
호(號)첩취옹(輒醉翁)
생년1745(영조 21)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미술 > 화가
김석무(金錫武)

[상세내용]

김홍도(金弘道)
1745년(영조 21)∼미상.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
1. 가계‧중요화력
만호를 지낸 김진창(金震昌)의 종손이자 김석무(金錫武)의 아들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畵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2. 성품
조희룡(趙熙龍)『호산외기(壺山外記)』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금강전도」의 시화첩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3. 작품경향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주듯이, 주로 화보(畵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北宗院體畵的傾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歚)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皴)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4. 풍속화 작품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弘齋全書
壺山外記(趙熙龍)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우리나라의 옛 그림(李東洲, 博英社, 1975)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韓國의 美 21―檀園 金弘道―(鄭良謨監修, 中央日報 季刊美術, 1985)
檀園 金弘道의 在世年代攷(崔淳雨, 美術資料 11, 國立中央博物館, 1966)
檀園 金弘道의 생애와 예술(洪善杓, 學園 296, 1984. 7.)

[이미지]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대표명김홍도(金弘道)
성명김홍도(金弘道)
사능(士能)
단원(檀園)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