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숙(劉淑)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20C219FFFFB1828X0 |
자(字) | 야군(野君) |
호(號) | 혜산(蕙山) |
생년 | 1827(순조 27) |
졸년 | 1873(고종 1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한양(漢陽) |
활동분야 | 미술 > 화가 |
[상세내용]
유숙(劉淑)
1827년(순조 27)∼1873년(고종 10).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영(善永) 또는 야군(野君), 호는 혜산(蕙山).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사과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852년(철종 3)과 1861년에 철종어진(哲宗御眞)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872년(고종 9)에는 고종어진도사(高宗御眞圖寫)의 수종화사(隨從畵師)로 종사하였다.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의하면, 그는 전기(田琦)‧김수철(金秀哲)‧이한철(李漢喆)‧유재소(劉在韶)‧박인석(朴寅碩)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유하며 김정희(金正喜)의 지도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대하여 김정희는 “필치에 속기(俗氣)는 없으나 다만 적윤(積潤)의 의(意)가 모자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남긴 산수화들을 보면 「세검정도(洗劍亭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이 실경을 다룬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김정희풍의 문인화와 상통되는 작품들과 더불어 김홍도(金弘道) 화풍의 일면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는 산수화와 함께 영모(翎毛)‧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 등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풍속화는 그를 고비로 유행의 막을 내리게 된다. 씨름하는 장면을 소재로 다룬 「대쾌도(大快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김홍도 화풍의 여운을 남기면서 조선 후기에 풍미하였던 풍속화 유행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미원장배석도(米元章拜石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다.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사과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852년(철종 3)과 1861년에 철종어진(哲宗御眞)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872년(고종 9)에는 고종어진도사(高宗御眞圖寫)의 수종화사(隨從畵師)로 종사하였다.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에 의하면, 그는 전기(田琦)‧김수철(金秀哲)‧이한철(李漢喆)‧유재소(劉在韶)‧박인석(朴寅碩)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유하며 김정희(金正喜)의 지도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대하여 김정희는 “필치에 속기(俗氣)는 없으나 다만 적윤(積潤)의 의(意)가 모자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남긴 산수화들을 보면 「세검정도(洗劍亭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이 실경을 다룬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김정희풍의 문인화와 상통되는 작품들과 더불어 김홍도(金弘道) 화풍의 일면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는 산수화와 함께 영모(翎毛)‧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 등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풍속화는 그를 고비로 유행의 막을 내리게 된다. 씨름하는 장면을 소재로 다룬 「대쾌도(大快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는 김홍도 화풍의 여운을 남기면서 조선 후기에 풍미하였던 풍속화 유행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무후대불도(武后大佛圖)」‧「화외소거도(花外小車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계산추색도(溪山秋色圖)」‧「미원장배석도(米元章拜石圖)」(이상 개인 소장) 등이 있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韓國의 美 12―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2)
韓國繪畵大觀(劉復烈, 文敎院, 1969)
韓國繪畵史(安輝濬, 一志社, 1980)
韓國의 美 12―山水畵 下―(安輝濬監修, 中央日報社, 1982)
[집필자]
홍선표(洪善杓)
대표명 | 유숙(劉淑) |
성명 | 유숙(劉淑) |
성명 : "유숙(劉淑)"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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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