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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용(鄭元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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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선지(善之)
호(號)경산(經山)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783(정조 7)
졸년1873(고종 10)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동만(鄭東晩)
처부김계락(金啓樂)
외조부이숭우(李崇祐)
저서『경산집』
저서『황각장주(黃閣章奏)』
저서『북정록(北征錄)』
저서『수향편(袖香編)』
저서『문헌촬요(文獻撮要)』

[상세내용]

정원용(鄭元容)
1783년(정조 7)∼1873년(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부친은 돈녕부도정 정동만(鄭東晩)이며, 모친은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정기세(鄭基世), 목사 정기년(鄭基年), 부사 정기명(鄭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내다가, 1821년 서북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청나라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 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실록청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출신으로 20여년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경산집』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紀事
國朝榜目
萬姓大同譜

[집필자]

한영국(韓榮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