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李羲準)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76CC900B1775X0 |
자(字) | 평여(平汝) |
호(號) | 계서(溪西) |
시호(諡號) | 문정(文靖) |
생년 | 1775(영조 51) |
졸년 | 1842(헌종 8)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한산(韓山) |
활동분야 | 문학 > 문인 |
부 | 이현영(李顯永) |
생부 | 이태영(李泰永) |
조부 | 이산중(李山重) |
[상세내용]
이희준(李羲準)
1775년(영조 51)∼1842년(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여(平汝). 호는 계서(溪西)로 알려져왔으나, 형인 이희평(李羲平)의 호가 잘못 전하여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군자감정 이산중(李山重)의 손자로, 예조참판 이태영(李泰永)의 다섯째아들이며, 뒤에 이현영(李顯永)에게 입양되었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09년 한림도당회권(翰林都堂會圈)에 올랐다.
1825년 예부승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가자(加資)되고, 1827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30년 경기감사로 부임하여 칙수불부(勅需不敷)‧우역조폐(郵驛凋弊)‧환곡모축(還穀耗縮)의 삼폐(三弊)를 상소하여 윤허를 얻기도 하였다. 경기감사의 임기가 찼으나 주전사업(鑄錢事業)이 막 펼쳐졌기 때문에 유임되다가 1832년 물러났다.
이듬해인 1833년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주전 통용의 폐해에 대한 계(啓)를 올리고, 삼사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이듬해 신위(申緯)와 함께 풀려났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자, 고부 겸 주청부사(告訃兼奏請副使)로 중국에 갔다.
1837년 부태묘(祔太廟) 때 종헌관(終獻官)으로 가자되고, 공조판서에 올랐다.
1838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중국에 갔으며, 형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840년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시문에도 능하였다. 『계서야담』이 그의 편저라고 전하나 형인 이희평의 저술이라는 설도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군자감정 이산중(李山重)의 손자로, 예조참판 이태영(李泰永)의 다섯째아들이며, 뒤에 이현영(李顯永)에게 입양되었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09년 한림도당회권(翰林都堂會圈)에 올랐다.
1825년 예부승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가자(加資)되고, 1827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30년 경기감사로 부임하여 칙수불부(勅需不敷)‧우역조폐(郵驛凋弊)‧환곡모축(還穀耗縮)의 삼폐(三弊)를 상소하여 윤허를 얻기도 하였다. 경기감사의 임기가 찼으나 주전사업(鑄錢事業)이 막 펼쳐졌기 때문에 유임되다가 1832년 물러났다.
이듬해인 1833년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주전 통용의 폐해에 대한 계(啓)를 올리고, 삼사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이듬해 신위(申緯)와 함께 풀려났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자, 고부 겸 주청부사(告訃兼奏請副使)로 중국에 갔다.
1837년 부태묘(祔太廟) 때 종헌관(終獻官)으로 가자되고, 공조판서에 올랐다.
1838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중국에 갔으며, 형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840년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시문에도 능하였다. 『계서야담』이 그의 편저라고 전하나 형인 이희평의 저술이라는 설도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國朝榜目
古鮮冊譜
朝鮮後期文獻說話의 硏究(曺喜雄, 螢雪出版社, 1980)
國朝榜目
古鮮冊譜
朝鮮後期文獻說話의 硏究(曺喜雄, 螢雪出版社, 1980)
[집필자]
조희웅(曺喜雄)
대표명 | 이희준(李羲準) |
성명 | 이희준(李羲準) |
성명 : "이희준(李羲準)"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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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