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회(李翊會)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75D68CB1767X0 |
자(字) | 좌보(左甫) |
호(號) | 고동(古東) |
시호(諡號) | 문간(文簡) |
생년 | 1767(영조 43) |
졸년 | 1843(헌종 9)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의(全義)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낙배(李樂培) |
생부 | 이득배(李得培)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익회(李翊會)
1767년(영조 43)∼1843년(헌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좌보(左甫), 호는 고동(古東). 병조판서 이제신(李濟臣)의 8대손으로, 이득배(李得培)의 아들이며, 이낙배(李樂培)에게 입양되었다.
음보(蔭補)로 김제군수가 되고, 1811년(순조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7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1820년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825년 대사성을 거쳐 1827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1834년 홍문관제학에 올라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1835년(헌종 1) 돌아와 대사헌이 된 뒤 여러 번 거듭해서 대사헌의 직을 지냈으며, 1843년 한성부판윤에 이르렀다.
글씨에 능하였으며, 작품으로 「삼우당문익점신도비(三憂堂文益漸神道碑)」를 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음보(蔭補)로 김제군수가 되고, 1811년(순조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7년 홍문관에 등용되고, 1820년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1825년 대사성을 거쳐 1827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1834년 홍문관제학에 올라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1835년(헌종 1) 돌아와 대사헌이 된 뒤 여러 번 거듭해서 대사헌의 직을 지냈으며, 1843년 한성부판윤에 이르렀다.
글씨에 능하였으며, 작품으로 「삼우당문익점신도비(三憂堂文益漸神道碑)」를 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楓皐集
槿域書畵徵
朝鮮金石總覽
憲宗實錄
國朝榜目
楓皐集
槿域書畵徵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이종호(李棕浩)
대표명 | 이익회(李翊會) |
성명 | 이익회(李翊會) |
성명 : "이익회(李翊會)"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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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