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명(李惟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20BA85B1767X0 |
자(字) | 치순(穉順) |
호(號) | 동포(東圃) |
생년 | 1767(영조 43) |
졸년 | 1817(순조 17)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염(李琰)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유명(李惟命)
1767년(영조 43)∼1817년(순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순(穉順). 호는 동포(東圃).
선조의 넷째아들인 신성군(信城君) 우(珝)의 후손으로, 공조좌랑 이염(李琰)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고, 1801년(순조 1)에는 참봉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거쳐 그 이듬해에는 전적이 되었다.
1806년 부수찬으로 있으면서 의리를 지켜나가기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그뒤 우부승지를 지냈다.
1812년에 대기근이 연속되고 또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감진사(平安道監賑使)로서 백성들의 구호와 관군의 군량미조달을 감독하는 한편,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안핵사(按覈使)를 겸하여 민심수습에 전력하였다.
그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되어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으며, 뒤이어 완원군(完原君)을 습봉(襲封)하고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이 되었는데, 특히 병조참판으로 있을 때는 군비를 확충하고 군기를 확립하여 국내외의 도전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뒤 다시 동지의금부사에 취임해서는 지배층의 기강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조의 넷째아들인 신성군(信城君) 우(珝)의 후손으로, 공조좌랑 이염(李琰)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고, 1801년(순조 1)에는 참봉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거쳐 그 이듬해에는 전적이 되었다.
1806년 부수찬으로 있으면서 의리를 지켜나가기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그뒤 우부승지를 지냈다.
1812년에 대기근이 연속되고 또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감진사(平安道監賑使)로서 백성들의 구호와 관군의 군량미조달을 감독하는 한편,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안핵사(按覈使)를 겸하여 민심수습에 전력하였다.
그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되어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으며, 뒤이어 완원군(完原君)을 습봉(襲封)하고 병조참판과 예조참판이 되었는데, 특히 병조참판으로 있을 때는 군비를 확충하고 군기를 확립하여 국내외의 도전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뒤 다시 동지의금부사에 취임해서는 지배층의 기강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김호종(金昊鍾)
명 : "유명(惟命)"에 대한 용례
전거 | 용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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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捷錄v01 | 義安君珹大司成惟命六代祖 |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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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