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양(柳鼎養)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C815C591B1767X0 |
자(字) | 석로(錫老) |
생년 | 1767(영조 43)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유당(柳戇)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유정양(柳鼎養)
1767년(영조 43)∼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석로(錫老). 공조판서 유당(柳戇)의 아들이다.
생원으로서 1809년(순조 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서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11년 태천현감으로 있을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만나 진무하지 못하고 영변으로 도망한 죄로 한때 파직당하였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다시 재등용되고, 이어 수찬‧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813년 10월에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한용탁(韓用鐸)과 부사 조윤수(曺允遂)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8년 영변부사로 재직중 앞서 홍경래의 난이 있었을 때 도피하였다가 평정된 뒤에 돌아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도륙하고, 그것을 공으로 내세운 것이 발각되어 지평 조영걸(趙永傑), 영변부안핵어사 한용의(韓用儀), 평안감사 이조원(李肇源) 등의 끊임없는 탄핵을 받아 6월 장흥부에 유배되었다.
그뒤 석방되어 1828년 동지사의 부사로서 정사 홍기섭(洪起燮), 서장관 박종길(朴宗吉)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2년 뒤인 1830년에 양사와 옥당(玉堂)에서 함께 연서한 탄핵을 받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1831년 2월에는 오히려 호군이 되었다.
생원으로서 1809년(순조 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서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811년 태천현감으로 있을 때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만나 진무하지 못하고 영변으로 도망한 죄로 한때 파직당하였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다시 재등용되고, 이어 수찬‧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813년 10월에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한용탁(韓用鐸)과 부사 조윤수(曺允遂)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8년 영변부사로 재직중 앞서 홍경래의 난이 있었을 때 도피하였다가 평정된 뒤에 돌아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도륙하고, 그것을 공으로 내세운 것이 발각되어 지평 조영걸(趙永傑), 영변부안핵어사 한용의(韓用儀), 평안감사 이조원(李肇源) 등의 끊임없는 탄핵을 받아 6월 장흥부에 유배되었다.
그뒤 석방되어 1828년 동지사의 부사로서 정사 홍기섭(洪起燮), 서장관 박종길(朴宗吉)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2년 뒤인 1830년에 양사와 옥당(玉堂)에서 함께 연서한 탄핵을 받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1831년 2월에는 오히려 호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陣中日記
西征日記
國朝榜目
陣中日記
西征日記
國朝榜目
[집필자]
손승철(孫承喆)
대표명 | 유정양(柳鼎養) |
성명 | 유정양(柳鼎養) |
성명 : "유정양(柳鼎養)"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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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