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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순(金達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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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도이(道而)
호(號)일청(一靑)
시호(諡號)익헌(翼憲)
생년1760(영조 36)
졸년1806(순조 6)
시대조선후기
본관안동(安東[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이현(金履鉉)

[상세내용]

김달순(金達淳)
1760년(영조 36)∼1806년(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新]). 자는 도이(道而), 호는 일청(一靑). 군수 김이현(金履鉉)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 1803년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전직 군수현감과 유생 등이 순조정순왕후(貞純王后)의 총애를 받던 좌의정 서용보(徐龍輔)를 제거하고자 상소를 올리고 통문을 발하였다. 이에 서용보는 그도 관계되었다고 하여 인책하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책도중 순조의 동가(動駕) 때에 불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05년 홍문관제학을 거쳐 전호조판서 이서구(李書九)가 죄를 쓰고 물러감에 따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서구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한 뒤 그해 특지로 우의정이 되었다.

그뒤 『정조실록』을 바치고 『선조보감(先祖寶鑑)』의 편찬을 청하였다. 벽파(僻派)였던 그는 박치원(朴致遠) 등을 포증(褒贈)하라고 진주(陳奏)하였다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등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공격을 받고, 홍주목을 거쳐 남해안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강진현에 이배되어 사사되었다. 뒤에 다시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집필자]

정중환(丁仲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