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직(李東稷){2}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3D9C9C1B1749X0 |
생년 | 1749(영조 25)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종휘(李種徽) |
조부 | 이정일(李廷一) |
외조부 | 최보흥(崔普興)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동직(李東稷)
1749년(영조 25)∼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이정일(李廷一)의 손자로, 이종휘(李種徽)의 아들이며, 모친은 최보흥(崔普興)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해 예문관검열을 뽑기 위하여 왕이 친림한 특별시험에서 한영운(韓永運)‧권빈(權儐) 등 세 사람이 뽑혔다.
이어 홍문관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1782년(정조 6) 감찰이 되고, 이듬해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으며, 1784년 홍문록에 오른 뒤 수찬이 되었다. 이어 교리가 되어서는 홍국영(洪國榮)과 권세를 같이하려는 무리들을 탄핵하였다.
1792년 부교리로 재직중 박지원(朴趾源)의 저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함을 상소하였고, 다시 남인 이가환(李家煥)을 서학교도라고 논척하여 충주목사로 좌천시키는 등 주자학적 전통에 입각하여 신학문의 배척에 앞장섰다.
1800년 대사간에 오르고, 그뒤 대사헌‧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5년(영조 51)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해 예문관검열을 뽑기 위하여 왕이 친림한 특별시험에서 한영운(韓永運)‧권빈(權儐) 등 세 사람이 뽑혔다.
이어 홍문관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1782년(정조 6) 감찰이 되고, 이듬해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으며, 1784년 홍문록에 오른 뒤 수찬이 되었다. 이어 교리가 되어서는 홍국영(洪國榮)과 권세를 같이하려는 무리들을 탄핵하였다.
1792년 부교리로 재직중 박지원(朴趾源)의 저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함을 상소하였고, 다시 남인 이가환(李家煥)을 서학교도라고 논척하여 충주목사로 좌천시키는 등 주자학적 전통에 입각하여 신학문의 배척에 앞장섰다.
1800년 대사간에 오르고, 그뒤 대사헌‧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일기(金馹起)
대표명 | 이동직(李東稷){2} |
성명 | 이동직(李東稷) |
성명 : "이동직(李東稷)"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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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