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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귀(韓用龜)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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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한용구(韓用九)
자(字)계형(季亨)
호(號)만오재(晩悟齋)
시호(諡號)익정(翼貞)
생년1747(영조 23)
졸년1828(순조 28)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후유(韓後𥙿)
조부한현모(韓顯謩)

[상세내용]

한용귀(韓用龜)
1747년(영조 23)∼1828년(순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한용구(韓用九).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재(晩悟齋).

참판 한현모(韓顯謩)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 한후유(韓後𥙿)의 아들이다.

1772년(영조 48) 성균관 재학시 황감제(黃柑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6년 주서가 되고, 이어 예조좌랑을 지냈다.

1779년(정조 3) 문신전강(文臣殿講: 3품 이하의 문신들을 대상으로 어전에서 經書를 考講하게 한 시험)에서 다시 장원으로 뽑혔다.

그뒤 응교(應敎)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로 있을 때 올린 소에서 왕을 모독하였다 하여 삭주(朔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다시 이조참의에 오른 뒤 형조참판대사헌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99년 평안도관찰사 재직시 평양에 대화재(大火災)가 발생하여 민가 175호가 불에 탄 사건을 당하였으며, 그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예조판서를 거쳐 1805년(순조 5) 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김달순(金達淳)이 사사될 때에 이에 관련되어, 관직을 사퇴하였다.

다시 관직에 나와 진하사(進賀使)청나라에 다녀온 뒤 1812년 이후 여러 해를 좌의정 겸 세자사부(左議政兼世子師傅)로 있으면서 사직소를 거듭 올렸으나, 국사(國事)가 어렵고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사퇴가 허락되지 않을 만큼 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1821년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장례를 치른 다음 사퇴하였다. 시호는 익정(翼貞)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雲石遺稿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