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윤(趙德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B355C724B1747X0 |
자(字) | 수이(修爾) |
시호(諡號) | 효정(孝貞) |
생년 | 1747(영조 23) |
졸년 | 1821(순조 2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임천(林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명정(趙明鼎) |
생부 | 조명욱(趙明勗)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덕윤(趙德潤)
1747년(영조 23)∼1821년(순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수이(修爾). 조명욱(趙明勗)의 아들로, 조명정(趙明鼎)에게 입양되었다.
1775년(영조 5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 지평으로 재직하였다.
이듬해 7월 헌납 심풍지(沈豊之)의 상소로 1775년의 문과가 파방(罷榜)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792년(정조 16) 12월 지평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양구현감‧홍문관교리‧사간‧첨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뒤, 1799년 6월 곡산부사로 나갔다.
1801년(순조 1) 승정원승지로 임명된 뒤 대사간‧예조참판‧공충도관찰사‧함경감사‧호군(護軍)‧공조판서‧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하고, 1815년 2월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홍문관교리 이진연(李晉淵)의 인사행정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소로 대사헌으로 체직(遞職)되었다. 이후 한성부판윤‧분내국제조(分內局提調)‧병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해 지평으로 재직하였다.
이듬해 7월 헌납 심풍지(沈豊之)의 상소로 1775년의 문과가 파방(罷榜)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792년(정조 16) 12월 지평으로 복직되었다. 이후 양구현감‧홍문관교리‧사간‧첨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뒤, 1799년 6월 곡산부사로 나갔다.
1801년(순조 1) 승정원승지로 임명된 뒤 대사간‧예조참판‧공충도관찰사‧함경감사‧호군(護軍)‧공조판서‧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하고, 1815년 2월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홍문관교리 이진연(李晉淵)의 인사행정상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소로 대사헌으로 체직(遞職)되었다. 이후 한성부판윤‧분내국제조(分內局提調)‧병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純祖實錄
國朝榜目
增補文獻備考
[집필자]
남인국(南仁國)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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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