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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유(韓晩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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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성(汝成)
생년1746(영조 22)
졸년1812(순조 12)
시대조선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광회(韓光會)

[상세내용]

한만유(韓晩𥙿)
1746년(영조 22)∼1812년(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성(汝成). 판의금부사 한광회(韓光會)의 아들이다.

1773년(영조 49) 육경경과대증광전시(六慶慶科大增廣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78년(정조 2) 정언이 되고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이어서 지평은산현감을 역임하였다.

1794년(정조 18) 승지에 오른 뒤 이조참의를 거쳐 1798년 예방승지가 되었는데, 이때 황해도감영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자 근간에 공해(公廨)의 화재가 많은 것을 들어 영속리(營屬吏)를 엄히 문책하여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을 진언하였다.

1801년(순조 1) 강화유수가 되고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청나라에 다녀왔다.

1803년 형조판서가 된 뒤 지의금부사한성판윤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05년 대왕대비(영조의 계비 貞純王后)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가 되었다.

1806년 판의금부사가 되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조문언(趙文彦)이 군량(軍糧)을 도용(盜用)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하여 중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다 오히려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로 복직되고 비변사제조를 거쳐, 1808년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안주목사 이해청(李海淸), 중화부사 이일우(李一愚) 등이 탐관오리로 형을 받게 되자 전관(銓官)으로서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원자탄생의 권초관(捲草官)‧금오당상(金吾堂上)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하였다.

1811년 예문관제학이 되고 이어서 다시 한성판윤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