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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필(李義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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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이상악(李商岳)
자(字)교백(喬伯)
호(號)창계(蒼溪)
생년1738(영조 14)
졸년1808(순조 8)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존중(李存中)

[상세내용]

이의필(李義弼)
1738년(영조 14)∼1808년(순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상악(李商岳). 자는 교백(喬伯), 호는 창계(蒼溪).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의 아들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언행에 다소 과격한 면이 있었다.

1766년(영조 4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문학홍문관수찬응교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성균관대사성에 발탁되었고 승지를 거쳐 1779년(정조 3)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홍국영(洪國榮)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보행(李普行)영의정 서명선(徐命善)명응(命膺)형제를 탄핵한 바 있는데, 여기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부제학에서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강계부사 등 지방관을 거쳐 여러 차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95년 대사헌으로 재임시 천주교인의 처벌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대사간 최헌중(崔獻重)이 천주학을 배척하는 데 가탁(假托)하여 왕을 비방하고 있다며 처벌을 주장하였다가 도리어 편당(偏黨)으로 몰려 단천으로 귀양갔다.

몇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 호조참판형조판서함경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1805년(순조 5) 우참찬으로 재임시 사포서(司圃署)일로 좌의정 서매수(徐邁修)를 탄핵하는 가운데 심한 말이 들어 있다 하여 순안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귀양에서 풀려나와 광주유수를 지냈다.

1807년 7년 전함경감사 재임시에 귀양간 사람을 임의로 죽였다는 정언 서준보(徐俊輔)의 상소로 인하여 죄가 소급 적용되어 유수에서 파직되었다. 정조조에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