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수(徐浩修)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D638C218B1736X0 |
자(字) | 양직(養直) |
시호(諡號) | 문민(文敏) |
생년 | 1736(영조 12) |
졸년 | 1799(정조 2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서명익(徐命翼) |
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
생부 | 서명응(徐命膺) |
조부 | 서종옥(徐宗玉) |
저서 | 『연행기』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호수(徐浩修)
1736년(영조 12)∼1799년(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양직(養直).
부친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응(徐命膺)이며,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백부 서명익(徐命翼)에게 입양되었다.
1756년(영조 32) 생원(生員)이 되고, 1764년 칠석제(七夕製)에 장원하고 이어 다음해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하였다. 곧 지평(持平)에 초임되었으나 언사(言事)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766년 홍문관부교리에 특채되어 벼슬을 시작하였다.
1770년에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어 왕의 측근이 되었다. 이해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정사(正使) 이은(李溵), 서장관(書狀官) 오대익(吳大益)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사성‧대사헌 등 청관직(淸官職)을 거쳐 당대 문화사업의 핵심기관이었던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에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는데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교열하고, 1781년(정조 5)에는 『규장총목(奎章總目)』 4권 3책을 책임 편찬하였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할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를 고출(考出)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또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기초가 된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는 규장각에 원임직제학(原任直提學)의 직함으로 간여하면서 이조‧형조‧병조‧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남인(南人)으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채제공(蔡濟恭)과 소론(少論)의 명문이었던 그의 집안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일시 휴직하였다가 1790년에 다시 진하 겸 사은부사로 두번째 청나라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번의 사행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팔순(八旬)을 기념하는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여행일기가 『연행기(燕行紀)』 4권 2책이다. 다음해 관상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인조 때 김육(金堉)이 주장한 바 있는 시헌력(時憲曆)의 사용을 위해 청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하여금 이에 소용되는 의기(儀器)를 구입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795년 삼상(三相)의 후보에 올랐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다시 1798년 우의정의 물망에 올랐으나 역시 좌절되었다. 끝내 삼상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이조판서에 그쳤다.
정조 동궁시의 빈료(賓僚)로서 정조의 즉위에 공로를 세운 서명응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북학파의 학자로 규장각의 각종 편찬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더욱이 두 차례의 연행(燕行)을 통하여 서적수입 등 청문화의 도입이라는 정조의 내밀한 임무 부여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으니, 위에서 언급한 제2차여행때의 일기인 『연행기』에 의하면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주역절중(周易折中)』‧『시서휘찬(詩書彙纂)』‧『대청회전(大淸會典)』‧『성경통지(盛京通志)』 등은 구매하였으나 『황청해국방략(皇淸海國方略)』은 구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둘째아들인 서유구(徐有榘)는 사촌 서철수(徐澈修)에게 출계(出繼)하였으나 가학을 계승하여 다음 시대에 북학자로 활약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시호는 문민(文敏)으로 “민첩하며 배우기를 좋아했으니 문(文)이요, 일에 대승하여 공이 있으니 민(敏)이라 하였다.” 그러나 뒤에 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과 같다 하여 정헌(靖憲)으로 개칭되었다. 묘지명은 아우인 서영수(徐詠修)가 짓고 아들 서유본(徐有本)이 추기(追記)하였다.
저서로는 『연행기』가 있다.
부친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응(徐命膺)이며,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백부 서명익(徐命翼)에게 입양되었다.
1756년(영조 32) 생원(生員)이 되고, 1764년 칠석제(七夕製)에 장원하고 이어 다음해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하였다. 곧 지평(持平)에 초임되었으나 언사(言事)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766년 홍문관부교리에 특채되어 벼슬을 시작하였다.
1770년에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어 왕의 측근이 되었다. 이해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정사(正使) 이은(李溵), 서장관(書狀官) 오대익(吳大益)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사성‧대사헌 등 청관직(淸官職)을 거쳐 당대 문화사업의 핵심기관이었던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에 규장각의 여러 편찬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다하였는데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교열하고, 1781년(정조 5)에는 『규장총목(奎章總目)』 4권 3책을 책임 편찬하였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할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를 고출(考出)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또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기초가 된 『어제춘저록(御製春邸錄)』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는 규장각에 원임직제학(原任直提學)의 직함으로 간여하면서 이조‧형조‧병조‧예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남인(南人)으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채제공(蔡濟恭)과 소론(少論)의 명문이었던 그의 집안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일시 휴직하였다가 1790년에 다시 진하 겸 사은부사로 두번째 청나라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번의 사행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팔순(八旬)을 기념하는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여행일기가 『연행기(燕行紀)』 4권 2책이다. 다음해 관상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인조 때 김육(金堉)이 주장한 바 있는 시헌력(時憲曆)의 사용을 위해 청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하여금 이에 소용되는 의기(儀器)를 구입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795년 삼상(三相)의 후보에 올랐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다시 1798년 우의정의 물망에 올랐으나 역시 좌절되었다. 끝내 삼상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이조판서에 그쳤다.
정조 동궁시의 빈료(賓僚)로서 정조의 즉위에 공로를 세운 서명응의 아들로 가학(家學)을 계승하여 북학파의 학자로 규장각의 각종 편찬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다하였다.
더욱이 두 차례의 연행(燕行)을 통하여 서적수입 등 청문화의 도입이라는 정조의 내밀한 임무 부여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으니, 위에서 언급한 제2차여행때의 일기인 『연행기』에 의하면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주역절중(周易折中)』‧『시서휘찬(詩書彙纂)』‧『대청회전(大淸會典)』‧『성경통지(盛京通志)』 등은 구매하였으나 『황청해국방략(皇淸海國方略)』은 구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둘째아들인 서유구(徐有榘)는 사촌 서철수(徐澈修)에게 출계(出繼)하였으나 가학을 계승하여 다음 시대에 북학자로 활약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시호는 문민(文敏)으로 “민첩하며 배우기를 좋아했으니 문(文)이요, 일에 대승하여 공이 있으니 민(敏)이라 하였다.” 그러나 뒤에 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과 같다 하여 정헌(靖憲)으로 개칭되었다. 묘지명은 아우인 서영수(徐詠修)가 짓고 아들 서유본(徐有本)이 추기(追記)하였다.
저서로는 『연행기』가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大邱徐氏世譜
正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大邱徐氏世譜
[집필자]
정옥자(鄭玉子)
명 : "호수(浩修)"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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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3 | 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