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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병(尹弼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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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중(彛仲)
호(號)무호암(無號庵)
생년1730(영조 6)
졸년1810(순조 10)
시대조선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사용(尹師容)
증조부윤이제(尹以濟)

[상세내용]

윤필병(尹弼秉)
1730년(영조 6)∼1810년(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중(彛仲), 호는 무호암(無號庵).

공조판서 윤이제(尹以濟)의 증손이며, 윤사용(尹師容)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필법이 곧고 발라서 11세 때는 강세황(姜世晃)이 그의 글씨를 보고는 왕우군(王右軍)의 골자(骨子)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자라서 경사(經史)를 익히고 백가서(百家書)를 공부하니 학문이 더욱 넓고 깊었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매양 시를 지으면 원근에서 전송(傳誦)하였다.

1765년(영조 4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6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성균관직강예조정랑지평을 역임하고 장련현감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고, 이속(吏屬)들은 엄하게 다루는 한편 사민(士民)들에게 학습을 권장하니, 문풍(文風)이 떨치고 치적이 현저하였다.

그뒤 1778년(정조 2)에는 장령으로서 상소하여 면군덕(勉君德)‧파붕당(破朋黨) 등 4조를 진술하였다.

1786년에는 다시 친림춘당대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함에 따라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첨지중추부사병조참지안악군수좌승지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그는 4년간 재직하면서 병기와 성첩(城堞)을 수선하고, 군사의 조련에 힘쓰면서 읍민 자제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가르치니, 뒤에 청덕비(淸德碑)와 생사(生祠)가 세워졌다. 다시 대사간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대신(臺臣)의 무계(誣啓)로 파직되었다.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고 조정이 일변하여 이듬해에 당국자들이 신유사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일망타진하려 하므로, 그는 호군의 직책으로 100여명을 거느리고 척사소를 두번이나 올렸으며, 1802년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가족을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서학배척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행동으로 파직, 문외출송되어 서울을 떠나 포천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性齋集
國朝榜目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