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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金華鎭){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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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재(聖載)
시호(諡號)익헌(翼憲)
생년1728(영조 4)
졸년1803(순조 3)
시대조선후기
본관강릉(江陵)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상우(金尙遇)
생부김상적(金尙迪)

[상세내용]

김화진(金華鎭)
1728년(영조 4)∼1803년(순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성재(聖載).

부친은 참판을 지낸 김상적(金尙迪)이며, 큰아버지인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김상우(金尙遇)에게 입양되었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이래, 정언수찬부교리교리에 차례로 제수되었고, 1760년에 준천어사를 지냈다.

1770년 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어 안동부사경기감사를 지냈으며, 1776년 대사헌에 이어 이듬해 한성부우윤을 겸직하였다.

1778년(정조 2) 예조판서에 제수되었고 호조병조판서에도 제수되었으나 파직되고, 1781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같은해에 다시 호조판서가 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으며, 숭록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782년 형조판서가 되고 우참찬예조판서호조판서형조판서를 두루 지내면서, 공부(貢賦)‧식화(食貨)‧조운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의 시정에 힘썼다.

1783년 서학문제로 채제공(蔡濟恭)의 죄를 탄핵하다 일시 파직되었으나 도감제조(都監提調)에 다시 임명되었다.

1784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어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인 천주교도들을 체포했으나, 대부분이 양반의 자제들이라 타일러 보내고 중인(中人) 김범우만을 단양에 귀양보냈다.

1785년 판의금부사원접사(遠接使), 이어 좌참찬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96년 호조판서에 제수되어 주전사업(鑄錢事業)과 전세(錢稅)문제를 관장하였고, 특히 동전이 박열(薄劣)해지는 것을 근심하였다.

1797년에 파직되고 이어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해 12월에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김재찬(金載瓚)이 직을 대신하고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노론으로 남인의 규탄에 참가했으나 비교적 완론(緩論)에 속하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經山集(鄭元容)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대표명김화진(金華鎭){1}
화진(華鎭)
성명김화진(金華鎭)

명 : "화진(華鎭)"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政堂故事v5吏則亦必至某當該吏令秋曹卽爲嚴問口招三堂上開坐査問於是金華鎭曰洪之所奏近於風聞嚴治府吏臺體不嚴矣上命華鎭遞差元義孫代之刑判韓翼謩參判洪麟漢參議李重祐承牌開坐推問府吏夜二更入侍洪麟漢讀吏招後命書傳敎略曰身爲
政堂故事v10華鎭事至七月十八日停啓
國朝捷錄v01伯後江陵人栢川判書添慶子華鎭五代祖翰林
景慕宮儀軌v3慕宮宫告由之節何以爲為之乎上曰當宮宫告由可也華鎭曰今此上尊號時頒教陳賀之節依例磨錬乎上曰依例磨錬可也華鎭曰今此定號之日當爲為進箋何以爲為之乎上曰定號後當日進箋是應行之擧舉今明適値齊日退行於再明日可也
景慕宮儀軌v3見入侍時行禮曹判書金華鎭所啓景慕宮宫加上尊號時宗廟社稷景慕宮宫告由之節何以爲為之乎上曰當宮宫告由可也華鎭曰今此上尊號時頒教陳賀之節依例磨錬乎上曰依例磨錬可也華鎭曰今此定號之日當爲為進箋何以爲為之乎上曰定號
景慕宮儀軌v3護匣外樻則當以前日還下件取色以用乎上曰依爲為之提調金華鎭所啓景慕宮宫上冊印時以親上磨錬乎上曰依爲為之華鎭曰景慕宮宫加上尊號時宗廟永寧殿社稷景慕宮宫告由祭當擇日磨錬而今二十七日爲為吉云上尊號日字雖有先後告由
景慕宮儀軌v3殿社稷景慕宮宫告由祭當擇日磨錬而今二十七日爲為吉云上尊號日字雖有先後告由祭則同日設行何如上曰依爲為之華鎭曰宗廟永寧殿社稷告由祭獻官依例以一品磨錬而景慕宮宫獻官亦爲為一體磨錬何如上曰依爲為之初十日景慕宮宫展
訓局謄錄v38上曰依爲之華鎭曰把摠哨官不計久勤與否一從該營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